끔찍한 피의 숙청이 끝나고 궁내는 다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어. 아직 그 후유증이 완벽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숨을 돌릴 정도는 되었지. 토니의 노력 덕분에 스티브는 점점 궁중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어. 스티브는 좁고 어두운 방에서 별궁으로 옮겨졌어. 음식도 신경 써서 잘 나오고 스트레스 받는 일도 줄어들자 혈색도 눈에 띄게 좋아졌지. 매일 토니는 스티브를 침소로 부르거나 직접 별궁으로 찾아갔지. 왕비 가문은 애가 타기 시작했어. 궁 밖으로 내쳐질 거란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고, 사주 했던 용병 일은 토니를 부추기게 한 꼴이 돼버렸으니까. 거기다가 남자 오메가는 임신하기가 어렵지만 힛싸가 없는 대신 가23임기가 따로 있질 않았거든. 진짜 왕손을 벤다면 후궁으로라도 세우려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라 생각했어. 하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어.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토니가 저번 일을 다시 파헤쳐 버리면 피를 보는 게 본인들일 수 있으니까.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침묵하기로 했지.






“어떤가요?”


스티브가 침대 위에 누워 제 손목의 진맥을 살피던 궁정 의사를 보며 물었어. 요새 스티브는 부쩍 몸이 나른하고 쉽게 피로해지는 것 같았어. 스티브를 담당하는 의사는 정기적으로 스티브의 상태를 확인하고 관리하는데, 토니가 특별히 신경 써서 붙인 자였어. 스티브가 몸이 갑자기 예전 같지 않다고 하자 의사가 별궁에 들려 진찰하던 참이었어. 머리가 희끗한 남자는 스티브의 진맥을 보다가 갑자기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어. 스티브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묻자 의사는 서둘러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더니 휴식을 취하면 나아질 거라고 둘러댔어. 그는 스티브의 별궁을 나서더니 곧바로 사람을 시켜 서신을 보냈어. 서신은 빠르게 왕비의 손으로 전해졌지. 뭔가 일이 생기면 낱낱이 자기한테 먼저 보고하라고 왕비가 손을 써뒀기 때문이었어.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왕비가 회임이라는 단어를 보고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었어. 노예이면서도 고상한 척 하는 낯짝이 꼴 보기 싫었는데 기어이 임신을 했다니까 속이 뒤집어 지겠는 거지. 토니는 첫날밤 이후 자기 처소에 한 번도 들지 않았고 스티브의 별궁으로 발걸음을 돌린다는 소리만 무기력하게 듣고 있어야 했어. 애초에 애정이 있어 혼인한 것도 아니라 토니의 관심은 기대 해본적도 없지만 후사를 볼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건 참을 수 없었어. 다음 후계자는 제 가문에서 나와야 하니까. 왕비는 역모 죄로 망해버려 별 볼일도 없는 스티브를 토니가 끼고 도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는 거야. 그것도 로저스 가문을 역적으로 모는 데 젤 앞장섰던 인물이. 사람들도 이제 스티브가 말만 노예라는 걸 다 알고 있었어. 한 나라의 왕비가 노예 따위에게 밀린다는 건 그녀에겐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 왕비는 아버지에게 서신을 보내기 위해 펜을 집어들었어.



-



럼로우는 최근 들어 이상하게 스티브 주변에서 안 좋은 일이 자주 생긴다고 생각했어. 우연치고는 빈도가 너무 잦았지. 마치 누군가가 고의로 살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어제는 스티브가 산책을 하다 살짝 기댄 다리가 끊어져서 물에 빠질 뻔 하기도 했어. 럼로우가 끊어진 다리를 살펴보니 누군가가 교묘하게 잘라놓은 흔적이 있었어. 럼로우는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왕비 가문뿐이 없다 생각했지. 우연인진 모르겠지만 성안이 발칵 뒤집혀 혼란한 시기와 맞물려 일이 진행되는 것 같았어. 며칠 전,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사신이 돌아가다가 국경에서 살해를 당한 사건이 있었거든. 노략질을 하던 강도들에게 낭패를 당한 것이었지만 이웃국은 니네 나라의 국경 안이었으니 책임지라며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어. 전쟁까지 언급하며 예민하게 나오니 토니는 머리를 쥐어 싸야만 했지. 지금은 한시라도 스티브에게서 눈을 떼기 싫은데 말이야. 


그래서 토니의 각별한 부탁으로 럼로우가 대신 신경을 쓰며 스티브의 별궁을 감시하고 있었어. 스티브의 방 근처에 있다가 음식이 올 때마다 곁에서 지켜보는데 어느 날 럼로우는 궁에 들어온 낯선 얼굴을 발견했지. 왠지 수상해서 계속 주시하는데 음식을 나르는 여자의 표정이 스티브에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이상하게 떨리는 거야. 여자가 스티브 앞으로 쟁반을 내오자 럼로우가 손으로 저지하며 살기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어. “먼저 먹어보거라.” 여자가 흠칫 놀라더니 꼼짝 못하고 얼어붙자 럼로우가 칼을 뽑아들었어. 여자의 목에 칼을 들이대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바닥으로 쟁반을 떨어트렸지. 그릇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깨졌어. 여자가 무릎을 꿇으며 빌었어. “모, 목숨만은 제발 살려주십시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끌려 나가고 스티브는 여전히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어.


“독입니다.”


럼로우는 깨진 그릇에서 흘러내리며 색이 변질된 스프를 살폈어. 이젠 음식에까지 독을 타다니. 더 노골적으로 스티브를 죽이려 드는 것 같았지. 아무래도 토니가 갑자기 정사일로 바빠진 게 독을 보낸 자들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았어. 국경 사건으로 토니는 잠자리에 드는 것 외에 스티브와 함께 있질 못했거든. 럼로우는 조작이라면 눈 감고도 쉬운 족속들이 왕비 가문이라 더 의심이 갔지. 스티브를 역모 죄로 몰아넣었을 때 토니와 일을 조작했던 인물들이 지금의 그들이니까. 돈이라면 안되는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어. 이대로 가다가 스티브가 죽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지.


하지만 럼로우는 스티브의 임신 사실은 모르고 있었어. 왕비가 궁정 의사에게 입을 다물라 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아는 건 왕비와 측근들뿐이었어. 회임 소식이 알려지면 토니의 모든 관심이 쏠릴게 분명하니까 그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워버리겠다는 계산이었지. 럼로우는 스티브가 토니와 권력 싸움을 할 때도 딱히 어떤 편에 섰던 자도 아니고 개인적인 감정도 없는 사람이지만, 이상하게 스티브에게 자꾸 눈이 가고 안쓰러워 보호해주고 싶었어. 그 고생을 하던 스티브가 여기서 권력 싸움에 휘말려 죽는 건 개죽음이나 다름없었지. 무슨 짓을 써서든 스티브를 살리고 싶었어. 이 상황에 목숨을 살리려면 제일 확실한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지. 럼로우는 스티브의 어깨를 붙들고 목소리를 낮게 깔았어.


“로저스, 제 말 잘 들으십시오. 오늘 밤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스티브는 럼로우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지 모르는 건 아니야. 스티브도 제 목숨을 계속 노리는 무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선뜻 성을 떠난다고 결정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 이제 노예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처우도 나아졌고 토니도 자신한테 지극정성인걸. 지켜야할 것도 제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냥 이렇게 지내다 때가 되면 죽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거든. 더 이상의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았지. 그러자 럼로우도 스티브의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뜻밖의 말을 꺼냈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당신 부모님을….”


럼로우의 말에 스티브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어. 스티브의 커다랗게 뜨여진 파란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지.


“사실 그때 교수형에 처해진 게 아닙니다. 여전히 폐하의 감시 하에 있죠.”

“…제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계시다구요?”

“그렇습니다.”


스티브의 가족을 다 몰살시켰다는 말은 토니의 거짓이었어. 스티브를 무너트리는게 목적이었고 만약에라도 스티브가 자기에게서 등 돌릴 시에 꺼낼 수 있는 최후의 수단, 스티브가 제 가족을 가지고 도박할리는 없을 테니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일종의 보험인 셈이었지. 스티브와 관계가 잘 풀리고 카드를 꺼낼 일 없이 오랫동안 묻혀있었는데 그게 결정적인 순간에 토니의 발목을 잡는 셈이 되고 만거야. 생이별을 하고 죽었단 말을 들은 지도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가족이 살아있다는 소식은 스티브에게 꺼졌던 의욕의 불씨를 되살리게 만들었어. 럼로우가 귓가에 작게 속삭이고 방을 나갔어.


“잊지 마세요. 오늘 밤입니다.”






스티브는 밤중에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어. 토니는 곤히 잠들어 있었어. 잠들기 전에 스티브가 살짝 물에 수면제를 타 먹인 탓에 옆에서 나는 기척에도 깨어날 수 없었지. 럼로우가 오늘 밤 가족들도 빼돌리겠다고 했어. 기회는 딱 한번 뿐이라 했지. 스티브는 옷을 챙겨 입고 몰래 토니의 방을 빠져나왔어. 궁내의 비밀통로를 스티브보다 잘 아는 사람은 드물었어. 럼로우가 미리 손을 써둔 덕분에 보초들도 없었어. 약속한 장소에 도달하자 물가에 작은 배가 한척 묶여 있었어. 스티브는 배에 올라타 컴컴한 밤하늘을 가르며 노를 젓기 시작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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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가 토니의 곁을 떠난 지도 6년이 흘렀어. 스티브는 철저히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었어. 가끔 럼로우가 스티브가 묵고 있는 성에 들릴때마다 전해주는 바깥 소식이 전부였어. 토니가 미친 듯이 스티브를 찾아 헤맨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지만, 돌아갈 생각이 있었다면 성을 떠나지도 않았을 거야. 스티브는 이름을 바꾼 채 럼로우가 아는 사람의 성에서 살고 있었어. 가족은 럼로우가 빼돌려 안전한 곳에 있었지. 스티브는 신변을 위해 어쩌다 가끔 한 번씩 들려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데 만족했어.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해야 했지.


스티브는 성에서 빠져나온 2주 후 입덧을 하고 토니의 아이를 임신한걸 알았어. 그제야 왜 외척들이 자길 죽이려 들었는지 알게 됐지. 성에 계속 있었다간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 죽었을지도 몰라. 아이를 낳자 살아남아야 겠다는 생각은 더 확고해졌어.


“아빠!”


피터가 럼로우의 품으로 와락 달려들었어. 럼로우가 번쩍 안고 공중에서 한 바퀴 돌리자 피터가 신나게 깔깔거렸어. 럼로우는 요새 1주일에 한번 꼴로 성에 들렸어. 토니의 태도가 느슨해지자 럼로우는 제법 여유롭게 스티브를 보러 올 수 있었지. 성을 빠져나온 직후 럼로우가 발걸음을 한 건 스티브의 배가 산만하게 올라왔을 때였으니 그때랑 비교해보면 상황이 많이 나아진거야. 주변 사람들은 피터가 모두 스티브와 럼로우의 자식인줄로만 알고 있었어. 그렇게 알고 있는 편이 더 안전했으니까. 피터가 자랄수록 토니를 더욱 닮아가는 건 둘만 아는 사실이었지.


피터가 놀아달라며 매달리자 럼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어.


“미안한데 금방 다시 가봐야 한단다.”


럼로우는 피터의 머리를 쓰다듬었어. 실망한 피터가 입을 삐죽거렸어. 어쩌다 한 번씩 들러 잠깐 머물고 가버리는 바람에 피터는 럼로우와 제대로 된 시간을 보내지 못했어. 아버지의 품에서 한창 응석 부릴 나이에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노는 피터를 볼 때마다 스티브는 가슴이 아팠지. 토니라면 피터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끔찍이 여겼을 테니까. 피터가 유모의 손에 이끌려 나가자 럼로우는 스티브와 방으로 들어갔어. 럼로우는 테이블 의자를 빼 앉으며 최근 돌아가는 상황을 얘기했지.


“요새 상황이 꽤 좋아졌습니다. 폐하께선 다시 정사에 몰두하고 계시죠. 이제 마음을 정리한 듯 싶습니다.”

“잘 됐네요.”

“요 며칠 전엔 합궁도 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회임 소식도 들려오겠죠.”


왕비가 아들을 낳으면 더 이상 자신과 피터를 찾아 죽이려 들지는 않을 거야. 스티브는 문득 토니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해졌지만 피터가 안전하려면 이대로 토니에게 잊혀져야만 하거든.

럼로우가 할 말을 다 마치고는 어색하게 찻잔을 만지작댔어. 하워드를 모실 때부터 십 년을 넘게 함께 지냈지만 럼로우는 여전히 말주변이 없었어. 스티브는 조용히 럼로우의 손을 잡았어. 럼로우는 언제나 무뚝뚝했지만 말하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절 아끼는지, 그 넘치는 애정을 스티브도 알 수 있었거든. 스티브가 처음 감옥으로 끌려왔을 때부터 언제나 곁에서 충직하게 지켜준 사람이었지. 스티브에게 그는 참 고마운 사람이었어. 약간의 침묵이 흐르자 한참 맞잡고 있던 손을 럼로우가 풀며 일어났어.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럼로우, 몸 조심해요.”


스티브가 럼로우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럼로우가 스티브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맞추고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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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는 럼로우가 떠난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어. 토니가 조용하다는 소식은 이상하게 스티브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날처럼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지. 럼로우의 신변이 계속 걱정됐어. 스티브는 자다 일어나 피터의 잠든 모습을 확인하고는 창가로 다가가 창밖을 내다봤어. 어둑한 사방은 고요하기만 했지. 스티브는 잠이 깨버린 바람에 서재에 나와 괜히 서적을 뒤적였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책을 덮고 책상을 정리하려던 스티브는 갑자기 찢어지는 비명 소리에 벌떡 일어났어. 성안에서 나는 소리였지. 스티브는 피터를 떠올렸어.


“피터, 피터!” 


스티브는 피터를 부르며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가 피터의 방으로 달려갔어. 벽에 걸린 어른거리는 횃불을 든 병사들의 긴 그림자에 스티브가 소스라치게 놀랐어. 피터의 방에 병사들이 진을 치고 서있었어. 방안으로 들어가자 피터가 놀라 울고 있었어. 달려가 피터를 품에 안자 창을 든 병사들이 스티브를 에워쌌어. 스티브가 경계하며 피터를 꼬옥 안고 있자 문으로 토니가 걸어 들어왔어. 토니의 싸늘한 얼굴은 그 날을 떠올리게 했어. 방심한 틈을 타 순식간에 스티브의 가문을 역모 죄로 몰아넣었던 날 말이야. 


토니는 스티브가 사라진 다음날부터 실성한 사람처럼 스티브를 찾아 헤맸어.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족치고 고문하고, 아무리 뒤져도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자취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지. 토니는 설마 싶지만 럼로우를 의심하기 시작했어. 그날 밤 보초들을 모두 물리고 스티브와 가족들을 한번에 빼돌릴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럼로우 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지. 감시를 붙였지만 럼로우가 철두철미한 덕분에 증거를 찾는데 6년이나 걸렸어. 토니도 인내심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니까. 그게 스티브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몇 년 만에 보는 스티브는 여전히 사랑스러웠어. 머리도 꽤 길어 앞머리가 이마를 덮고 있었어. 아름다운 금발은 어두운 다갈색으로 물들여 있었지. 토니는 성으로 데려가면 다시 금발로 염색시켜야겠다고 생각했어. 눈을 돌리자 스티브의 팔에 거슬리는 아이가 안겨 있었어. 토니는 인상을 구기더니 품에 있던 피터를 빼앗아 들었어. 스티브가 돌려달라며 달려들려 하자 병사들에게 제압당했어.


“이 아이가 그 놈 자식새끼더냐? 불결하게 생긴 것이 지 애비를 쏙 빼닮았군.”

“아이는 아무 잘못 없잖아요! 폐하”

“왕의 오메가를 가로챈 놈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광기에 사로잡힌 얼굴이 입 꼬리를 올려 히죽이는 모습은 스티브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어.


“럼로우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애비 보는 앞에서 이 아이를 죽이고 친히 고문할 것이니 당분간은 걱정할 필요 없다.”

“폐하!”

“살아있는 걸 저주할 때까지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여주지.”


토니는 피터를 럼로우의 아들로 착각하고 있었어. 피터가 럼로우에게 아빠라고 불렀으니 당연히 오해할 수밖에 없었지. 둘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정찰꾼에게 보고받은 토니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어. 럼로우의 아들이라니. 럼로우가 스티브의 곁에 있는 시간이 저와 머물던 시간보다 더 많았을텐데 왜 눈치를 못 챈건가 싶었어. 럼로우가 제 오메가를 빼돌렸다는 사실은 토니가 뭘 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정도로 이성을 잃게 했어. 스티브가 보는 앞에서 아이까지 둘다 죽일까? 토니는 이 참에 살려두었던 가족들까지 다 찾아 죽여버려야 겠다고 생각했지.


“그 동안 다른 알파와 붙어 먹는건 재미있었나, 스티브?”


스티브는 피터가 럼로우의 아들이 아니라고 소리질러 봤지만 토니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


“끌고 가라.”

“당신 아이예요!”


스티브가 밖으로 질질 끌려나가며 소리 질렀어. 토니가 제 아이란 말에 순간 멈칫했지. 내 아이? 목소리가 떨렸지만 그것도 잠시 뿐, 토니가 코웃음을 쳤어.


“살기 위한다면 무슨 말인들 못하랴, 궁지에 몰리니 입을 함부로 놀리는구나. 그 말을 믿으라니 날 바보로 여기는 것이냐?”


토니의 비아냥에 스티브가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어. 


“토니…. 제발, 당신 아이라구요. 제발 똑바로 봐줘요.”


처음 불리는 제 이름에 토니가 흠칫 했어. 스티브가 계속 흐느끼며 토니의 아이라고 하자 그제야 병사들에게 들려있는 피터를 제대로 들여다봤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던 다갈색 머리칼은 럼로우와 닮았다기 보다는 제 머리칼의 빛깔에 더 가까웠어. 이성을 잃어 장님처럼 보이지도 않던 게 갑자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 아이의 이목구비며 손가락이며, 누가 봐도 제 아이라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는데. 그 사이 난리 통에 흘러나온 스티브의 페로몬은 여전히 고유의 향을 간직하고 있었어. 스티브가 사라지던 바로 전날까지도 풍기던, 제 알파 향과 섞인 그 체향 말이야. 다른 알파와 몸을 섞지 않았다는 걸, 누가 봐도 저 아이가 제 아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는데 눈앞의 복수에 급급해 눈이 멀었던 걸까. 토니는 빽빽거리며 울고 있는 피터를 멍하니 보고 있었어. 그리고 무릎에 힘이 풀려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지.










Fin


보고싶은 마지막 장면이 토니가 망연자실하게 주저앉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끝났습니다 큭

토니가 찾아내지 않았으면 걍 셋이 살았을거임.

끝내고 싶어서 휘리릭 후딱 써버린 무책임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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