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는 소파에 앉아 손에 든 샌드위치를 베어먹으며 물끄러미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대부분은 티비를 시청하고 있었지만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람, 멍하니 천장을 보는 사람, 그리고 계속 히죽대는 사람 등등. 무미건조한 정신 병동 안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로 가득 차 보였다. 크리스의 파란 눈이 무심히 그들을 훑었다.

크리스가 가벼운 망상증이라는 병명으로 이 병원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돼가고 있었다. 병원에 올 당시 크리스는 자신을 지극히 정상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허나 최근 들어 그러한 확신은 병원에서 생활하면서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고요하던 병동 안의 고요함이 깨졌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구석 테이블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앉아있던 안경 낀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말은 거의 주고받은 적은 없지만 익숙한 얼굴이었다. 남자가 의자 밑에 내려놓았던 기다란 물건을 위로 치켜들었다. 철컥하는 쇳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손에 들린 것이 시야에 들어오자 크리스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Shit! 남자가 머신건을 장전하고 앞으로 겨누는 모습이 크리스의 눈에 마치 슬로우 화면처럼 느리게 펼쳐졌다. 총이 불을 뿜기 시작하자 난사되는 총알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평화롭던 병동 안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유리와 화병이 깨져 파편 조각들이 공중으로 튀었다. 크리스의 입에 물고 있던 샌드위치 반쪽이 아슬하게 총탄을 맞아 날아갔다. 히익! 크리스는 바닥을 기어가 기둥으로 몸을 피했다. 환자들과 간호사가 도망가다가 총을 맞고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총소리와 온갖 찢어지는 비명이 고막을 찢으며 울렸다. 크리스는 귀를 막고 벌벌 떨었다.


한참을 갈겨대던 총소리가 어느덧 멈췄다. 크리스가 빼꼼히 기둥 밖으로 얼굴을 빼자 남자가 총을 들고 삭막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갈색 눈동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죽은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경이 흘러내려 콧등에 걸쳐져 있었다. 남자가 안경을 슥 밀어올리며 고개를 들다 크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품에서 작은 권총을 꺼냈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총구를 자기 관자놀이에 겨누고 방아쇠를 건 손가락에 힘을 줬다. 탕-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자 누군가 달려와 크리스를 흔들었다.


“에반스씨? 괜찮아요?”


크리스가 공포에 떨며 고개를 들었다. 흰 가운을 입은 밤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크리스를 살펴보고 있었다.


……


주위를 둘러보니 환자들 몇몇이 얼빠진 표정으로 크리스를 보고 있었다. 그중엔 방금 전까지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대고 자기 관자놀이에 방아쇠를 당겼던 남자도 껴있었다. 안경 너머의 갈색 눈동자가 크리스를 무심히 쳐다봤다. 그리고 곧 관심 없다는 듯 크리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책장을 넘길 뿐이다. 크리스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대부분은 소파에 앉아 티비에 열중하고 있었다. 정신병원에서 비명을 지르는 정신 나간 사람이야 지겹게 보는 일상이었으니 크리스의 행동은 그들에게 별 주목거리가 안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피투성이가 됐던 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방으로 돌아가요. 크리스는 팔을 잡아끄는 힘에 이끌려 몸을 일으켰다.


크리스는 복도를 따라 방으로 걸어오는 내내 온몸에 힘이 없었다. 방금 전의 일은 사실인지 환각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평소에도 간간이 환각을 봐왔지만 이번 것은 더 상세하고 리얼했다. 주먹 쥔 손에 땀이 축축하게 베였다. 방에 돌아오자 간호사가 크리스를 부축해 침대에 앉혔다. 밤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는 평소에도 크리스를 잘 챙겨주며 친근하게 구는 편이었다. 고마워요. 크리스가 말하자 간호사가 웃으며 옆에 슬쩍 앉았다. 그녀는 차트를 침대에 놓고 크리스에게 팔짱을 꼈다. 꽤 파인 브이넥 밑으로 볼륨 넘치는 굴곡에 자꾸 시선이 갔다. 크리스는 그녀의 옷이 너무 파였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힐끔거리자 간호사의 붉게 칠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곤 유혹하는 것처럼 더 가슴을 밀착했다. 크리스가 얼굴을 붉히자 간호사가 말했다. 당신이 봐주니까 기뻐요. 크리스가 무슨 소리냐고 되묻자 간호사의 뺨이 홍조로 물들었다.


“가슴 수술했는데 봐줘서 기쁘다구요.”

“……”

“더 보고 싶지 않아요?”


여자가 툭툭 단추를 풀었다. Oh, god!


“…듣고 계신 건가요? 에반스씨?”


정신을 차리니 자기 앞에서 가슴을 풀어헤치던 간호사는 사라지고 엄한 눈동자 두 쌍이 크리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리스 앞에서 요염하게 단추를 풀던 간호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옆구리에 차트를 껴고 팔짱을 낀 채 말이다. Jesus…


“6시에 면담 잊지 말라구요.


간호사가 히들스턴과의 면담 약속을 상기시켜 주고는 뒤돌아 나갔다. 크리스는 혼란스러웠다. 이토록 생생한 환각이 머리를 괴롭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크리스는 닫힌 회색 문을 한참이나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



“크리스, 오늘 낮에 있었던 일 말해볼래요?”


크리스는 불안하게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톰이 크리스의 슬리퍼 신은 발을 향해 눈길을 주자 크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떨던 다리를 멈추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크리스의 시야에 그의 성격만큼이나 깔끔하게 다려진 새하얀 셔츠와 검은 넥타이가 들어왔다. 검은 곱슬머리에 학구적인 녹색 눈동자, 영국 악센트는 그의 지적인 매력을 더 돋보이게 한다. 크리스는 펜을 잡고 있는 그의 기다린 손가락을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크리스. 톰의 음성에는 상대를 재촉하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게 타이르는 힘이 있었다. 평소였다면 크리스는 벌써 자기 주치의 앞에서 다 떠들고 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기억을 되돌리고 싶지 않다.


“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오늘 살롱에서 비명을 질렀다던데요? 간호사들 말로는 유령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는데.”


톰이 부드럽게 크리스의 눈을 마주 봤다. 크리스는 모든 것을 다 포용해줄 것만 같은 그의 눈동자에서 왠지 모르게 아늑함을 느끼고 있었다. 톰이 다리를 꼬고 자세를 바꿔앉으며 말했다. 그냥 편안히 얘기해봐요. 톰이 크리스 쪽으로 몸을 더 기울였다. 크리스는 톰의 녹색 눈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꼼지락거렸다.


“구석에 자주 보는 남자가 앉아있었어요. 그 남자는 평소에도 말수는 적지만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었어요. 미친 사람들로 가득 찬 정신병원에서 ‘그나마’ 정상적인 사람이요.”

“…계속 얘기해봐요.”

“그런데 조용히 책을 보던 남자가 갑자기 총으로 사람들을 쏴 죽였어요.”

“끔찍하군요.”


크리스는 눈앞에서 남자의 머리가 터지는 걸 떠올리자 온몸이 오싹해졌다. 크리스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덜덜 떨자 톰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괜찮아요? 톰이 어깨를 감싸자 크리스가 그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자살하는 걸 봤어요. 내 눈앞에서 머리가 터져 죽는 모습요.”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환각일 뿐이에요. 그건 실제가 아니에요. 자살한 남자는 크리스 세계 속에 사는 허구의 존재니까요.”

“사실처럼 생생했다구요. 망할… 머리가 터졌다구요, 선생님. 왜 하필 그 남자가 죽는 환각을 본 걸까요? 만약 그 남자가 똑같이 자살한다면 전 어떻게 해야죠? 저 때문에 그 남자가 죽는 거 아닐까요? ”

“크리스, 벌어지지 않은 일에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크리스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으며 몸을 더 웅크렸다. 병원에 입원한 이후로 계속 부정해 왔지만 이제 자신이 정상이 아니란 걸 인정해야 할 때가 온건 지도 몰랐다. 크리스는 미친 사람들과 정신병원에서 평생을 썩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착잡해졌다. 톰이 크리스를 안으며 등을 토닥거렸다. 톰의 따뜻한 가슴에 안겨있노라니 놀란 가슴이 어느덧 진정되는 것만 같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충격의 물결이 잦아들 무렵 크리스는 그제야 어린애처럼 톰의 품에 안겨있다는 걸 인식했다. 몸을 빼야겠다는 생각을 하자 톰이 냄새를 맡는 것처럼 킁킁거렸다.


“크리스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네요.”


방금까지도 운동하고 온 터라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라면 쩌든 땀 냄새뿐일 것이다. 톰은 대놓고 목덜미에 코를 대고 냄새를 들이마셨다. 크리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살짝 빼자 톰이 다시 물었다.


“크리스는 매일 운동하나요?”

“그렇죠. 그게 병원에서 몇 안되는 제 할일이니까요.”

“운동을 매일 하는 이유가 뭐죠?”


크리스는 톰이 무슨 의중으로 하는 소리인지 혼란스러웠다. 의사가 환자한테 운동을 왜 하냐고 묻는 것만큼 이상한 질문도 없을 것이다. 당연히 제 건강을 위해 하는 거죠. 크리스는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크리스가 운동을 하는 건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 정해진 시간이 되면 짜인 대로 움직이는 것일 뿐 별다른 이유는 없다. 크리스에게 운동이란 오래전부터 몸에 밴 습관인 것이다. 가볍게 무시해보려 하지만 톰의 시선은 크리스의 몸을 바쁘게 훑어내린다. 톰이 유독 자기 가슴에서 눈을 못 떼는 것 같지만 크리스는 기분 탓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엉뚱한 질문에 크리스는 점점 표정관리를 하기가 힘들어졌다.


“크리스도 자기 가슴이 여자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사람들이 자기 가슴 얘기로 뒷담을 한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처음 입원했을 때부터 병동 사람들 사이에서 크리스의 몸매는 꽤나 화젯거리였다. 환자들뿐만 아니라 병원 직원들이 자신의 가슴에 대해 언급을 한다 해도 무리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방금 톰의 발언은, 그것도 환자 대 의사로서의 면담 시에 불쑥 가슴 얘길 꺼내는 건 상당히 노골적인 것만 같다.


“음… 이건 무슨 새로운 심리치료의 일환인가요?”


크리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톰이 대답 없이 무표정으로 일관하자 크리스는 살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장난이라면 이쯤…! 갑자기 크리스가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강한 힘에 뒤로 눕혀졌다. 선생님? 톰이 크리스의 양 손목을 머리 위로 결박하고는 체중을 실어 왔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톰은 뭔가 평소보다 난폭했다. ‘이건 심리 치료가 아니야.’ 크리스의 머릿속에 경보음이 울려댔다. 눈앞에 있는 곱슬머리의 남자는 톰의 탈을 뒤집어쓴 낯선 사람마냥 이질적이었다. 톰이 크리스의 셔츠 위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크리스가 허리를 비틀며 반항하려 하자 손목을 더 강하게 옭아매며 낮게 으르렁댔다.


“사실대로 말해. 가슴 빨리고 싶어서 운동하는 거 아니야? 나한테도 빨리고 싶어죽겠지?”


크리스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톰이 눈을 빛내며 크리스의 셔츠를 찢듯이 벗겼다.


“No!!!!!!!!"

“…리스, 크리스? 저기요… 똑똑”


톰이 맞은편에 앉아 테이블에 펜 끝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뭐가 안된다는 건가요? 크리스는 그제야 자기가 소파에 파묻혀 바보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또 환각을 본 거예요? 말간 녹색 눈동자가 크리스를 걱정스럽다는 듯이 응시하자 크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톰이 음란한 말을 입에 담으며 제 가슴을 빨려 하는 망상은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창피해서 얼굴을 제대로 들 수가 없다. 저렇게 단정한 사람을 앞에 두고 더러운 망상이나 하고 있다니. Fuck! Fuck!! 드디어 갈 데까지 갔구나 크리스.

크리스는 자신이 한심해 죽을 것만 같다.


“죄송한데,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크리스가 마른 세수를 하며 입을 열었다. 톰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크리스의 안색을 살폈다.


“아무래도 아까 낮에 본 장면이 충격이 컸나 봐요. 그… 크리스 ‘상상’ 속의 총격 씬 말이에요.”

“네… 다음에 얘기하면 안 될까요. 오늘은 상태가 안 좋은 것 같네요.”

“좋아요. 여기서 더 진행해봤자 좋을 것도 없을 거 같은데, 오늘은 이만하죠.”


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크리스도 따라 일어났다. 다음 면담 시간 잊지 마세요. 톰이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눈을 휘어 보였다.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자 톰이 다시 등 뒤에서 말했다. 약 먹는 거 꼭 잊지 마세요. 상태가 더 심각해지면 안 되잖아요. 크리스가 몸을 돌려 어색하게 웃자 톰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톰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온몸이 꼬여 죽을 것만 같았다. 크리스는 인사가 끝나자마자 도망치듯이 방을 빠져나갔다.



-



톰은 책상에 앉아 크리스 에반스라 적힌 파일을 펼쳐 일지를 적어내려갔다. 가벼운 망상증 때문에 온 환자였지만 계속 관찰해보니 단순한 망상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일부러 환각 효과를 부추기는 약을 투여하니 반응이 오는 듯했다. 오늘 크리스의 반응은 평소보다 효과가 있었다. 상담하는 의사에게 의존적인 성향도 보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크리스의 증상이 더 심해지는 것 같으니 상황을 지켜보며 약을 조절하기로 했다.


톰은 파일을 접어 옆으로 치우고는 크리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늘 그는 다른 때와 다르게 충동을 자제하기 힘들었다. 운동을 바로 마치고 와서인지 평소에도 큰 크리스의 가슴은 더 팽팽하게 올라붙어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터질 것처럼 셔츠 밑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에 톰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였다. 거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소파에 기대 끙끙대던 모습은 선정적이기까지 해 그의 가슴을 움켜쥐고 빨고 싶다는 충동을 누를 수가 없었다. 크리스가 잠깐 정신을 잃은 덕분에 흥분한 걸 들키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톰은 자신의 밑에 깔려있는 크리스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자 아랫도리가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상대가 상상하는 대로 크리스한테 환각처럼 보이는 건데 

톰이 주는 약을 먹어서 점점 더 심해진다는 그런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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