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가 정신을 차리자 흐릿한 시야로 스티브가 미지근한 물을 담은 세숫대야에 물수건을 적시고 있는 게 보였어. 다 갈라진 목소리로 스티브를 부르자 스티브가 화들짝 놀라며 의원을 찾았지. 꼬박 한나절을 정신을 잃고 기절해 있던 터라 피터는 목이 따끔거리며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어. 목이 마르다고 하자 스티브가 얼른 물을 가져와 피터의 입에 대주며 괜찮으십니까?라며 걱정스럽게 물었어. 피터는 제 이마의 열을 재보는 스티브의 애정 가득한 손길에 가만히 그 손길을 느끼고 있어. 며칠을 앓고 혼절하는 걸 반복하며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간절한 정인의 체취에 가슴이 뜨거워졌지. 하지만 느껴지는 이 감각은 분명히 평소와는 뭔가 달랐어. 관계 시에만 맡을 수 있는 스티브의 향긋한 향이 코끝을 맴돌며 간지럽히는데 그 포근하고 달콤한 향이 스티브와 계속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고 싶지 않게 했어. 피터가 코를 킁킁대며 품으로 파고들자 스티브가 당황하며 몸을 뒤로 물렸어. 저하… 자꾸 피하는 게 싫은지 피터가 따라붙으며 스티브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비비적거렸어.


“그대의 품에서 아주 좋은 향이 납니다. 향수라도 뿌리셨습니까?”


피터가 제 품에 안겨 강아지처럼 눈썹을 늘어트리고 킁킁대는 것이 귀여운 스티브는 빙긋 웃으며 밤톨만 한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어.


“향수라니요. 마마, 그건 제 페로몬입니다만….”


스티브는 입을 열면서도 피터가 어떻게 제 페로몬을 맡을 수 있는 건지에 대한 의구심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코를 스치는 톡 쏘는 상쾌한 향에 눈이 크게 뜨였어. 아까부터 은은하게 방을 채우고 있는 낯선 향이 피터의 페로몬이었단 걸 뒤늦게 알아채고 말이야.


토니는 의자에 앉아 잘근잘근 손톱을 깨물고 있었어. 피터의 상태를 보고 온 이후로 불안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어. 진짜 알파로 발현할까 봐 내심 초조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지. 그때 내관이 안으로 달려 들어왔어. “무슨 소란이냐?” 허둥거리는 모습에 안 그래도 심기 불편한 토니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패었어.


“폐하, 세자 저하께서 알파로 발현했다 하십니다!”

“뭐야?”


눕다시피 깊숙이 앉아있던 토니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어. …진짜 발현했어? 토니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어.


“감축 드리옵니다. 이건 다 하늘과 같으신 황제 폐하의 은덕에…”


눈치 없는 내관은 토니의 얼굴이 굳게 굳은 것도 모르고 계속 큰소리로 떠들다가 짜증이 가득 담긴 당장 나가란 소리에 짜지듯이 사라졌지. 젠장 젠장!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토니보다 발현이 약간 느리긴 했지만 토니의 우성 알파 유전자와 피터 생모의 숨겨진 열성 유전자 때문에 피터가 알파로 발현하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었어. 생모가 베타라는 이유로 당연히 피터도 베타일 거라는 생각은 피터의 아버지가 토니 스타크라는 걸 간과한 거지. 아무리 생모가 베타라 하더라도 스타크 가(家)의 핏줄은 대대로 우성 알파를 배출하는 황실의 핏줄이니까.

알파가 아닌 베타라는 이유 하나로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던 아들의 핸디캡이 단번에 상쇄되는 이번 일은 아비 되는 토니로써는 분명히 쌍수를 들고 기뻐해야 할 일이었어. 다만 그건 스티브를 만나기 이전의 얘기지.

스티브가 그날로 모든 연락을 차단하고 관계를 거부했지만 아직까지 여유를 잃지 않은 건 토니가 우성 알파이기 때문이야. 토니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시 스티브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었어. 알오 간의 육체적 결합은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훨씬 더 복잡하고 동물적인 관계였어. 두 사람은 육체적으로 이미 깊게 각인된 사이이기 때문에 그 호르몬의 관계를 마음대로 끊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 스티브가 아무리 피터랑 만족한다 생각해도 결국은 베타와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한계점은 분명히 존재하니까.



토니는 우성 알파로써 남보다 우월한 자리에 있는 걸 즐기는 편이었지. 언제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우위에 있다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그런데 피터도 같은 알파라면 얘기가 달라져. 보통 우성성이 강할수록 발현할 때의 고통은 배로 더 컸어. 하루 만에 발현하는 일반적인 알파와 오메가에 비해 토니는 생사를 넘나들 정도로 꼬박 사흘을 앓았어. 피터도 병석에 앓아누운 지 삼일 째. 토니의 피를 닮아 우성 호르몬이 폭발하는 피터는 빼박 토니의 혈통다웠어. 그건 하워드도 마찬가지였고. 몸이 나으면 피터가 스티브를 완전히 차지할지도 모른단 생각에 토니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어. 지금도 이렇게 스티브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고 삐걱이는데 피터가 각성하면 이제 영영 빼앗길지도 몰라. 그렇게도 사랑하는 아들의 발현을 두고 토니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황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지.


피터가 알파로 각성했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스티브에게 제일 먼저 찾아와 축하 인사를 건넨 건 그의 부모님이었어. 그리고 연이어 세력가의 귀족들까지 찾아와, 세자 저하가 알파로 발현한 것은 다 세자빈께서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덕택이라며 입바른 소리를 했지. 피터를 세자로 탐탁지 않아 하던 사람들까지도 눈치를 보며 줄을 서고 있었어. 스티브는 토니랑 정리하고 나니 꼬였던 모든 일이 다 수월하게 풀리는 것만 같았지. 베타라는 것 때문에 끊임없이 발목 잡히던 남편이 알파로 각성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태세 전환하는 사람들의 모양새가 웃기고 허탈하기도 했어. 알파라는 건 참 좋은 형질이었어. 알파라는 이름 하나에 사람들이 벌벌 떨고 모든 게 다 손쉽게 정리가 돼 버리니까. 오메가 입장에선 약간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남편이 알파라는데 나쁠 것도 없지. 이제 스티브는 피터의 아이만 임신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어.


하루가 지나자 피터의 몸도 많이 호전되었어. 그리고 스티브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두근 뛰어댔지. 복숭아 향이 살짝이라도 스치면 페로몬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어 신기하기도 하고 하루 종일 끌어안고 냄새만 맡고 있고 싶었어. 어쩌다 흥분해 페로몬을 뿌리면 스티브가 난감한 표정으로 향을 조절해 달라고 얘기했지. 피터는 이제 막 발현된 상태라 페로몬을 조절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어. 다행히 스티브가 조절이 능숙한 우성이고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베타였으니 페로몬 때문에 곤란해지는 일은 없었지.

이제 슬슬 병석에서 일어날 때가 되자 피터는 세상 모든 것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어. 가슴 한켠이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했지. 피터가 한 번도 표현한 적은 없지만 스티브를 평생 만족시켜줄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우울한 적이 있었던 건 사실이야. 거기다 스티브의 눈에 저는 아직도 어린애였을 테니 어른스럽게 보이려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그 나잇대답게 폭발하는 성욕도 억지로 참았어. 하고 싶다고 무턱대고 달려들면 스티브가 짐승 같다고 질색할까 봐. 피터는 조금이라도 더 진중하고 성인답게 보이려 부단히도 애를 썼어. 그리고 좀 있으면 한 살도 더 먹고 거기에 딱 맞춰 알파로 각성한 피터는 이제 자신도 아버지처럼 어엿한 성인이라는 생각에 뿌듯했어. 게다가 피터는 차기 황제로써 손색없는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다 제게 우호적이었지. 하지만 현재 무엇보다도 가장 흥분되는 건 알파로 처음 관계하게 될 스티브와의 잠자리였어. 피터는 제 안의 끓어오르는 욕망이 평소에 느꼈던 성욕이 아니라는 걸 직감하고 있거든. 발정 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스티브를 제 오메가로 만들고 싶다는 욕구로 가득 찼지. 피터는 그게 노팅하고 싶다는 건지는 아직 모르고 있고.


다음 날 드디어 피터가 병석에서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세자궁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어. 평소에 얼굴 한번 비추지 않던 자들까지 모두 기회를 틈타 눈에 들려고 기를 썼지. 여자들도 마찬가지였어. 한동안 피터가 스티브와만 지내자 접근도 제대로 못하던 여자들이 알파가 된 걸 축하한다고 얼굴을 비추며 내심 환심을 사보려는 거였지. 세자궁은 거의 하루 종일 사람들의 발길로 끊이지 않아 저녁때가 되자 피터는 곤죽이 될 정도로 지쳤어. 오늘은 하루 종일 스티브의 얼굴도 못 본 것 같아. 피터가 아플 때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병간호를 한 스티브인데 정작 피터의 몸이 낫자마자 코빼기도 못 봤지. 섭섭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피터는 스티브한테 거처에 들를 테니 기다리라는 연통을 넣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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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을 다 정리하고 밤이 어수룩해질 때가 돼서야 피터는 방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어. 스티브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단 생각에 내관들을 닦달했지. 그때 피터에게 낯선 여자가 찾아와. 피터는 그냥 보내라고 하지만 여자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왔다는데 그 이국이 피터의 모국인 거야. 토니와의 하룻밤 인연으로 끝났다고 하는 어머니와 동향 사람이라 하니, 갓난아기 때 품에서 떨어져 얼굴도 본 적 없는 제 어머니를 떠올리자 낯선 여자에게서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졌어. 여자는 세자 저하께서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셨는데 모국에서 만든 제대로 된 술을 마셔봐야 하지 않냐고 하는 거야. 성인이라는 이미지에 집착 증세를 보이는 피터에겐 아주 솔깃한 이야기였지. 피터는 괜히 우쭐해진 마음에 평소 같으면 받아주지도 않았을 낯선 이가 주는 술잔을 흔쾌히 받았어. 술잔에 코를 갖다 대자 올라오는 냄새부터 독했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독한 술을 몇 잔 삼키자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며 온몸이 열로 들끓었어. 왜 이러지. 술에 뭘 탄 건가? 피터는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지. 피터가 머리를 쥐어 싸며 힘겨워하자 멀찍이 앉아있던 여자가 가까이 다가왔어. 여자는 야릇한 손길로 피터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목 부분을 죄고 있는 단추를 몇 개 풀었어. 그리고 밀착한 여자에게서 달착지근한 향이 흘러나오는데 오메가 향인 거야. 이 여자가 오메가였나? 이제 발현한 지 얼마 안 된 피터는 페로몬에 대한 면역이 거의 없었지. 오메가 향이 너무 강해 제정신을 차리고 있기 힘들었어. 밀어내려 하면 할수록 여자가 더 끈적하게 달라붙었어. 후각이 얼얼해질 정도로 코에 들이 퍼붓는 듯한 향에 금세 아랫도리가 뜨거워졌지. 여자의 몸에서 나는 향은 알파의 발정을 쉽게 유도하는 향수의 일종이었던 거야. 토니처럼 노련한 알파라면 전혀 먹히지 않을 향(싸구려라며 비웃었을)이지만 피터는 이제 막 발현했기 때문에 쉽게 이성을 잃고 동요했지. 피터는 거의 속수무책으로 향에 취했어. 정신이 혼미한 피터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그 달콤한 향이 나는 근원지를 탐하고자 하는 욕구뿐이었지. 피터는 스티브에게서 나는 향을 떠올렸어. 본능만이 남은 피터는 자기 품에 있는 사람이 스티브라 생각하고는 여자의 옷을 벗기며 넘어뜨렸어.


한편, 스티브는 소식 없는 피터 때문에 의아해하고 있었지. 온다고 하던 피터가 밤이 깊었는데도 전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뭔가 이상했어.


“오늘 밤에 오신다고 하지 않았었나?”


시종들도 세자의 행방을 모르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 스티브는 덜컥 겁이 났어. 오늘 무리를 하는 거 같더니 몸이 다시 안 좋아지기라도 한 건가 싶어서. 스티브는 피터 걱정에 빠르게 세자궁으로 향했지. 피터의 방문 앞에 당도하자 문밖에 서있던 시종들이 스티브를 보고는 깜짝 놀랐어. 다들 스티브의 질문에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혼이 빠진 것 마냥 벌벌 떨었지. 세자께 고하라고 해도 지금은 곤란하니 계속 다음에 오라고 하는데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스티브가 방문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문틈 사이로 진한 오메가 페로몬이 흘러나오는 거야. ! 문을 벌컥 열자 스티브는 온몸에 흐르는 피가 차갑게 식는 걸 느꼈어. 피터와 벌거벗은 여자가 침대에 한데 뒤엉켜 있었거든. 꽤나 난잡한 정사였는지 방안을 진동하는 페로몬부터 시작해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옷가지와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술잔을 보고 스티브는 할 말을 잃고 말았어. 뒤따라온 시종들이 방안을 들여다보고는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어. 피터는 그 와중에도 깨어날 줄을 몰랐지. 스티브는 세상모르게 잠들어있는 피터를 보면서 헛숨을 들이켰어. 알파로 발현하자마자 오메가를 끼고 동침이라니. 과연 피는 못 속이는 건가. 스티브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한참을 노려보다가 발걸음을 돌렸어.








근본없는 개연성 ㅈㅅ합니다 

어쨋든 이 썰은 토니스팁 떡치려고 쓴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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