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크리스는 간단한 식사를 마시고 창밖을 보며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셨다. 후식으로 나온 애플파이를 먹고 정오가 다 돼서야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크리스는 제가 지닌 옷 중에서 최대한 깔끔하면서 가장 잘 어울리는 옷으로 차려입었다. 오늘은 상대에게 잘 보여야기 때문이다. 정갈하게 마무리 한 칼라와 커프스단추가 반짝였다. 밖으로 나와 현관 문 앞에 서있자 하인이 달려와 우산을 씌워준다. “오늘은 비가 하루 종일 오려나 보군.” 크리스는 구멍이 뚫린 듯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한 시간 정도를 달려 으리으리한 저택의 정원으로 들어서자 곧 마차가 멈추고 하인이 문을 열어준다. “다 왔습니다, My lord.” 하인이 받쳐주는 우산을 쓴 채 크리스는 잘 가꿔진 정원과 분수대를 지나 현관까지 걸었다. 하인이 저택 현관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나온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크리스를 안으로 안내했다. 크리스는 붉은 카펫을 밟으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올랐다. 넓은 복도로 들어서니 벽에 걸린 예술작품과 조각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집 주인의 취향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장식품들이었다. 복도를 따라 육중한 문 앞에 다다르자 집사가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들어오십시오.” 안에서 남자의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 대리석 바닥이 벽까지 사방으로 뻗어있는 선명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천장이 크리스의 눈에 들어왔다. 아치 모양으로 된 창밖으로 정원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크리스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남자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자 크리스가 그에 화답하듯이 영업용 미소를 날렸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누치오 경.”


눈앞에 앉아있는 남자는 의외라고 생각될 정도로 유순한 태도를 유지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톰에게 볼썽사납게 패대기쳐진 이후 톰을 감옥에 넣으려 눈에 불을 켠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침착한 태도였다. 크리스는 그와의 약속도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라누치오가 흔쾌히 시간을 내어주니 일이 쉽게 마무리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직접 사과하러 방문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작 사과해야 할 사람은 코빼기도 안 뵈는데 경께서 고생이시군요.”


라누치오는 정중하게 크리스에게 몸을 숙이고는 소파를 손으로 가리켰다. 크리스가 자리에 앉자 라누치오는 맞은편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앉았다. 이번엔 선뜻 톰을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명망 있는 라누치오 가문과 얽히기 싫어하는 것도 이유였거니와, 대부분은 이번 일이 크리스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졸지에 톰과 라누치오 사이에 낀 크리스만 난처한 입장에 처하고 말았다. 크리스도 내심 억울하긴 했지만 가만히 앉아 톰의 재능을 골방에서 썩게 할 순 없는 일이었다. 공작을 아버지로 둔 라누치오 정도면 눈에 가시 같은 톰을 평생 감옥에 썩게 하고도 남을 인물이기 때문이다.


라누치오는 크리스가 말하는 내내 온화한 얼굴로 경청했다. 조각 같은 잘생긴 얼굴에 푸른 눈, 연신 생글생글 웃는 미소가 매력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크리스는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풍겨지는 위험한 냄새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톰과 비슷하게 사람을 끌리게 하는 구석이 있지만 반대로 뭔가 감추고 있는 듯한 음험함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문이 사실인가요?”


톰에 관한 얘길 하던 중 흐름을 끊듯 툭 던지는 라누치오의 질문에 크리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소문 말씀이죠?” 남자가 크리스의 말에 몸을 앞으로 당기며 눈을 빛냈다.


“히들스턴이 잠자리를 같이 하는 후원자를 그림에 그려 넣었다는 소문 말입니다.”


크리스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 남자가 말하는 화폭에 담긴 후원자라면 본인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라누치오가 크리스의 불쾌한 표정을 보자 수습하고 나섰다. 하지만 사과하는 그의 얼굴엔 여전히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제가 결례를 범한 것 같군요. 방금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Well, 우리가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히들스턴씨에 관한 고소를 취하해 주십사까지 얘기했습니다만,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보상이라… 보시다시피 제가 물질적인 것엔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서요. 그저 재미가 없다고나 해야 할까.” 


라누치오가 방 주변을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물질적 보상이란 이미 명예와 돈이 차고 넘치는 부유한 사람에겐 흥밋거리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거기다 이 남자는 톰과 인연이 좋지 않았다. 크리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경께서 히들스턴씨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번 일을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대해서는…” 

“에반스 경,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전 톰 히들스턴에게 딱히 악감정 같은 건 없습니다. 뭐 제가 찍어둔 창녀와 정부들을 그 한량이 여러 번 손을 댄 적이 있긴 하지만 주변에 널린 게 여자니까요.”

“……”

“하지만 매번 저랑 사사건건 엮이는 여자관계로 불쾌하다는 건 말씀드려야 겠군요.”

“그럼 제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소린가요?”


라누치오가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켜 크리스 앞으로 차를 내밀었다. “긴장 푸시죠. 아직 급하게 서두를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크리스는 뜨거운 차의 향을 맡으며 마지못해 잔을 홀짝였다. 말없이 크리스를 보고 있던 라누치오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우중충한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전에 얘기한 컬렉션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한 번 보시겠습니까?”


크리스는 을의 자격으로 방문한 입장에 그의 권유를 거절해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했다. 라누치오를 따라 옆방으로 가니 미술품과 각종 귀중품들이 방을 따라 진열돼 있었다. 미술품 애호가 집안답게 구하기 힘든 값비싼 물건들이 전시돼 있었다. 집안 대대로 몇 세대에 걸쳐 모은 귀중품들일 것이다. 크리스는 바티칸 미술관에서 봤던 문자에 눈길을 돌렸다. 비슷한 메소포타미아 상형문자가 그려진 고문이었다. “넘겨봐도 되나요?” 크리스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묻자 흔쾌히 답변이 되돌아왔다. 크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책장 하나하나 넘기며 저택에 온 목적을 잊을 정도로 금세 빠져들었다.


“경께서 무슨 매력을 감추고 계시길래 톰 히들스턴이 그리 날뛰었던 건지 궁금하군요.”

“매력이라뇨. 가당치도 않습니다.”


크리스는 고문에서 눈길도 떼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별 반응을 안 보이며 책장을 넘기고 있자 갑자기 뒤에서 다가온 팔이 어깨로 넘어왔다. 책장을 넘기던 크리스의 손등 위로 손이 겹쳐졌다. 뒤에서 안긴 꼴이 되자 크리스가 당혹스러움에 입을 열려는 사이 라누치오가 입을 열었다.


“톰은 여자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갈아 채는 놈이죠. 그런데 요새 창녀들을 찾지 않는다더군요. 하루라도 여자가 없으면 못 사는 섹.스 중독자 놈이…”

“……”

“대신 후원자 하나에 미쳐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그게 아무래도 당신을 말하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뒷조사를 좀 했습니다, 크리스 에반스 경.”


라누치오가 목덜미를 지그시 잡고 누르자 크리스가 움찔거렸다. 몸을 빼려 움직이자 양팔로 가슴을 꽉 죄여와 크리스는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그 놈은 타인에게 애정 같은 걸 나눠줄 인간이 아니거든요. 몇 번 침대에서 구른 창녀에게 복수랍시고 보복해봤자 눈 하나 깜짝 안 할 겁니다. 아니 얼굴조차 기억한다면 다행이겠죠. 거기다 라누치오 집안의 장남이 창녀 따위의 일로 망나니 놈과 소란을 피운다면 세상 사람들이 다 절 비웃을 겁니다.”


라누치오는 크리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어떤 비결로 나와 똑같은 놈을 미치게 했는지 참 궁금했습니다. 당신이랑 말 한 마디 나눈 것만으로도 죽일 듯이 덤비던데. 그런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군요.”


다리 사이로 무릎이 들어왔다. 허벅지가 엉덩이를 지그시 눌러왔다. 윽. 크리스는 이상하게 몸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방금 전에 마셨던 차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설마 차 안에 약을 탄 것인가. 약 기운까지 퍼져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몽롱해졌다. 크리스는 엉덩이에 뭉근하게 문질러지는 아랫도리가 느껴지자 소름이 끼쳤다. 벌써 흥분한 그의 것이 엉덩이를 찌르고 있었다.


“이 무례한…! 제발, 그만하시죠.”

“뒤에서 당하는 걸 좋아하나 보군요.”


크리스의 억눌린 신음에 라누치오가 눈을 번들거렸다. 단정하고 금욕적인 얼굴이 흐트러지는 것이 그의 흥분을 더 자극했다.


“이게 그놈을 감방에 처넣는 것보다 사람들의 눈도 피하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가 될 겁니다. 그 잘난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지는군요. 당신이 바라는 게 그놈의 고소 취하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군소리 말고 얌전히 안겨요. 일어나면 다 끝나있을테니.”


귀에 속삭이는 말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아까보다 거칠어진 라누치오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크리스는 팔을 옭아맸던 손이 가슴을 주물러 오는 걸 느끼고 반항해 봤지만 스르륵 눈꺼풀이 감기며 정신을 잃었다. 중간중간 깨어나 눈에 보인 건 제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남자의 흐릿한 모습과 헐떡이는 신음소리였다. 몸이 마치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자신의 몸이 아닌 것 마냥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몸이 뒤집혔다는 느낌이 들고 거친 숨결과 함께 남자의 머리칼이 목덜미에 닿았다. 크리스는 입으로 손가락이 들어오자 다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위가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침대에 누운 크리스의 시야에 낯익은 천장이 들어왔다. 빗줄기는 여전히 기분 나쁠 정도로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크리스는 추적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축 늘어져 있었다. 눈만 깜빡거리고 있으니 이마에 차가운 손이 닿는다. “이제 정신이 들었어?” 옆을 보니 톰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 온 거지.”

“네 하인이 집으로 데려왔어. 너무 오래 걸린다 싶어서 들어가 봤더니 기절해 있었다는군.”

“……”


크리스가 따가움에 목덜미에 손을 대니 물린 자국이 만져졌다. 이불을 들어 제 몸을 살피니 가슴과 허벅지 여기저기 울긋불긋 한 자국들이 남아있었다. 크리스는 몸에 남겨진 무수한 흔적들을 보며 라누치오 밑에서 무참히 유린당한 게 떠올랐다. 억지로 벌려진 입안으로 손가락이 들어오고 무의식중에 핥은 것까지 떠오르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허리가 삐거덕대며 온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크리스는 다시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도저히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톰에게 복수를 한다는 명목으로 이런 짓을 벌인다는 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또다시 톰을 내걸고 자신을 휘두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돋았다.


“미안해. 내가 정신 나간 놈처럼 구는 바람에 네가…”


침대 맡 의자에 앉아있던 톰이 말끝을 흐렸다. 크리스가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톰의 얼굴은 못 본지 이틀 새에 그새 수척해져 있었다. 톰은 크리스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 간밤의 일을 떠올렸다. 그의 단순한 질투심과 치기가 아무 이유 없이 크리스를 몰아세우고 상처 주었다. 왜 그렇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쥔 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건 나와 너에 대한 모욕이야.”

“톰”

“널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가르쳐 줄거야.”

“톰… 그러지 마.”


분노를 담고 있는 톰의 눈빛은 놀랍도록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빛을 흉흉히 빛내고 있는 그의 모습은 크리스도 한번 본 적 없는 생소한 얼굴이었다. 톰은 말릴 새도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톰!!!” 크리스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지만 약 기운에 걸을 힘조차 없었다. 풀린 무릎이 바닥에 주저앉자 열린 문으로 하인이 뛰어 들어왔다. “주인님!” 다시 침대에 뉘어지면서 크리스는 숨을 헐떡거렸다. 불안한 기운이 크리스의 몸을 엄습했다.


크리스는 톰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이후로 로비의 구석에 있는 소파에 앉아 초조함에 눈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다리가 쉴 새 없이 달달 떨렸다. 분명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거야. 불안하게도 밖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한밤중이 되자 불길함을 알리듯 누군가 사납게 현관문을 두들겼다. 크리스는 한 걸음에 뛰어나갔다. 유리 밖으로 톰을 확인한 크리스는 문을 벌컥 열었다. 빗줄기가 바닥으로 튀어 들어왔다. 손목을 잡아 안으로 끄니 톰이 크리스를 끌어안았다. 비에 홀딱 젖은 옷이 크리스의 마른 옷을 적셨다. “크리스…” 크리스는 톰의 뜨거운 가슴에 안겨 있다가 그에게서 나는 이상한 비릿한 냄새에 몸을 떼었다. 톰의 옷 여기저기에 붉은 얼룩이 물들어져 있었다. 비 냄새에 섞인 비릿함의 근원을 알아채고는 놀란 눈이 크게 떠졌다. 피? 크리스는 톰의 목 부근에 묻어있는 붉은 피를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타인의 피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듯 아무 상처 없는 매끄러운 목이 드러났다. 크리스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세상에 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

“제정신이야? 하다 하다 이젠 사람을 죽여?”

“그 놈은 죗값을 치른 것 뿐이야.”


톰의 푸른 눈과 가라앉은 목소리는 소름 끼치게도 침착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에 크리스는 다리를 휘청거렸다. 아니야. 크리스는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며 애써 현실을 부정했다. 톰은 크리스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조금 있으면 병사들이 깔릴 거야. 로마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널 보러 온 거야.”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크리스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톰은 손가락으로 크리스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입술을 겹쳤다. 뜨거운 눈물이 혀에 얽혔고 두 사람은 잠깐 동안 서로의 타액을 나눴다. 입술이 떨어지자 아쉬운 작별의 키스가 끝났다. “꼭 다시 돌아올게.” 톰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말을 남기고는 빗 사이로 뛰어가 버렸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에 크리스는 흐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빗줄기가 옷을 적시는 것도 괘념치 않고 그는 한참을 울며 앉아있었다.





그날 새벽 로마를 탈출하려던 톰의 계획은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변장을 들킨 톰은 그대로 병사들에게 잡혀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나흘 후에 열린 재판에서 톰은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크리스는 후원자들을 설득하며 톰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후원자들이 많다 해도 이제 그의 살인까지 막아줄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크리스는 마지막 희망인 베네데토를 찾아갔다. 베네데토는 크리스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교황의 눈 밖에 난 자라 사면을 내려주실까 싶군요.”

“하지만 시도는 해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의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생각해본다면…”

“에반스 경.”


베네데토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히들스턴은 이미 그가 벌인 수많은 기행, 그리고 이번 살인으로 정신 이상자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습니다.”

“……”

“요새 안 그래도 히들스턴과 경께서 후원자 이상의 관계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는데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그…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 민망합니다만.”

“…말씀 하세요.”

“경께서 히들스턴의 남색 상대라는 소문 말입니다. 과연 제가 신경 쓸 필요 없는 가벼운 풍문일 뿐일까요?”

“그 소문이 모두 진실이라 유감입니다, 베네데토 경”


크리스는 입술을 깨물며 베네데토의 눈을 흔들림 없이 응시했다. 베네데토가 말없이 크리스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자와 엮여 더 이상 경께 이로울 게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크리스는 톰을 위해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 그렇게 꼼짝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중 톰은 감옥에서 탈출했다. 로마를 벗어난 그는 말타 섬으로 도주했다. 톰은 말타에 머물며 기사 작위를 받고 싶었다. 기사 작위가 사면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톰은 기사 단장의 그림을 그려주고 말타의 기사단이 되었다. 그곳에서 톰은 환대를 받으며 작품 의뢰를 받고 추종자들을 만들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안정이 되자 그는 섬에 머물며 크리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신은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고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크리스는 사랑하는 톰에게서라고 적힌 마지막 문구를 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하지만 다른 기사단원과의 싸움으로 몰타에서의 안정적인 생활은 6개월이 채 안돼 끝나게 되었다. 톰은 기사단에서 제명당하고 또다시 감옥에 갇혔고 탈옥에 성공한 그는 나폴리로 도주했다. 불행히도 톰은 그곳에서 연적의 습격을 받고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 후 톰은 누군가에게 살해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톰은 끊임없는 싸움과 폭행, 도주 생활로 점점 편집적이 돼가며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졌다. 외딴곳에서 사랑하는 연인도 가족도 없이 홀로 외로움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그는 다시 창녀들과 어울렸고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납 성분에 감염돼 점점 광기에 빠지게 됐다.


나폴리에서 외로움과 싸우며 암울한 시간을 보낸 지 어언 1년, 새로운 교황이 취임하자 톰에게 사면령이 내려졌다. 그간의 업적과 공로를 인정해 내린 교황의 결정이었다. 톰은 사면령 소식에 교황에게 바칠 그림과 짐을 꾸리고 당장 로마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톰은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크리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로마에 도착하면 꿈에 그리던 크리스를 볼 수 있으리라. 오랜만에 톰의 가슴에 벅찬 환희가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그가 기쁨을 만끽하던 것도 잠시, 톰을 수상하다고 여긴 병사들에게 배에서 끌어내려지고 말았다. 로마로 출항하는 배는 주인 없는 그림과 짐만 실은 채 떠나갔다. 톰은 꿈만 같던 환상이 눈앞에서 거품처럼 그대로 사라지는 걸 멍하니 보고 있어야 했다. 

톰은 영문도 모른 채 병사들에게 끌려가 감옥에 갇혔는데, 사실은 다른 사람으로 오인됐던 걸로 밝혀져 이틀 만에 풀려났다. 톰은 짐을 찾기 위해 배가 떠난 해변을 따라 걸었다. 뜨거운 뙤약볕이 따갑게 내려쫴었다. 말라리아까지 얻어 제대로 먹지도 못한 몸은 정신적 충격까지 더해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톰은 실성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계속 해변을 걸었다. 머리가 타는 듯이 뜨거워 그 자리에서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입안은 바짝바짝 말라 가고 숨은 가빠 오고 눈앞은 점점 흐릿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모래 바닥에 무릎을 꿇자 눈앞의 풍경이 빙글 빙글 돌았다. 털썩. 이때까지 인생을 살아왔던 굴곡 넘치던 순간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하나하나 톰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이의 활짝 웃는 모습까지. 크리스. 그는 이름을 불러보려 했지만 갈라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말라붙은 입술만 달싹였다. 톰은 모래 바닥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교황 뒤에 서있는 크리스는 주인 없이 홀로 들려온 톰의 그림을 보았다. 젊은 남자가 어떤 중년 남자의 목을 베어 들고는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크리스는 화폭 안에 처참하게 잘려있는 목의 주인을 확인하고는 입을 막고 흐느꼈다. 톰은 자신의 참수당한 모습을 자화상으로 그렸던 것이다. 크리스는 그에게 내몰려진 극한 상황과 자기혐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을 연민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봐달라는 간절한 바람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톰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화단(畫壇)에서 그의 이름이 제명되었다. 그리고 화가와 문학가들에게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고작 작품 활동을 한지 2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강렬한 충격을 주었던 톰은 죽음 이후 사람들에게서 그렇게 잊혀졌다. 크리스는 위스키 두 잔을 따라 테이블 위에 놓고 외로이 톰을 추모했다.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주인 없는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치고 작게 중얼거렸다. 

Good bye, Tom.









휴 끝났다. 저거 쓸때 글 안써져서 한참 땅 팠던거라...막판에 엄청나게 날리긴 날렸죠ㅋ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사실 톰이 혼자 쫓겨다닐 때 얘기론 쓸게 별로 없긴 합니다만

그래도 나름 충실하게 화가의 일생 그대로 쓴것 같다고 생각... ?

저 공작 아들이 화가 여자 건드려서 살해당한건 맞으니깐요 크리스한테 끼워맞추느라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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