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부터 토니가 강력한 의지를 보이며 스티브의 폐위를 진행시켰어. 피터는 그날 밤 이후로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처소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상태였지. 가장 강하게 반대하던 피터까지 수그러들자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폐위는 신속하게 이뤄졌어. 폐위가 되자 스티브는 본가에서조차 외면받아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 토니는 궁에서 가까운 곳에 스티브가 지낼 곳을 마련해줬어. 토니의 아량이 썩 내키진 않지만 갈 곳 없는 스티브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토니는 남들 눈을 의식하느라 스티브의 거처에 자주 오진 못했어. 일주일에 한번 꼴로 오는데 그것도 정사가 바쁘면 이주에 한 번씩. 스티브는 한적한 곳에서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지. 토니와 끝없는 실랑이를 하고, 매일 피터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사람들에게 욕을 먹으며 혼자 마음 썩힐 때보단 차라리 궁밖에 있는 것이 나았어. 하지만 그 일로 본가에선 집안의 수치라며 스티브와 일체 모든 연락을 끊어 버리고 말았지. 모든 구속 상태로부터의 해방이라며 토니가 그럴싸하게 말하지만 이마에 낙인찍힌 폐서인은 스티브의 가슴에 큰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었어. 출가한 누이가 가끔 찾아와 쓸쓸한 스티브를 위로해주곤 했어.


어느 정도 스티브의 일이 정리되자 토니는 피터의 혼인식을 서둘렀어. 피터의 상대는 당연히 자길 열심히 도와준 샬롯이었지. 그리고 충실히 피터의 주변을 그녀의 오라비부터 시작해, 샬롯의 가문과 관계된 사람들로 채우고 있었으니까. 피터는 거의 생기 없는 얼굴로 혼인식에 임했어. 창백한 얼굴은 도통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 같지 않아 보였지. 밀회를 목격한 이후 쭉 그 상태였는데, 사람들은 세자빈의 일로 충격이 크겠다며 피터를 안쓰러워했어. 실상을 아는 토니만 양심에 찔리는 중이지. 


권력의 축은 빠르게 재편성되었어. 당연히 토니가 구축한 세력들로 모든 주요 관직이 채워졌어. 권력의 중심이었던 로저스 가문 등은 거의 다 외곽으로 밀려났지. 그렇게 한동안 시끄러웠던 궁은 제법 평화를 되찾아 가는 것만 같았어. 스티브가 임신을 하기 전까지 말이야. 




토니가 스티브의 집을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스티브의 배가 불러왔어. 상당히 조심스럽게 움직였기 때문에 토니가 스티브의 집을 드나든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었어. 간혹 알려진다 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루머쯤으로 취급받았지. 거기다가 스티브가 토니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건 누가 들어도 정신 나간 소리였으니까.

아이를 낳자 동생의 몸을 염려한 누이가 가끔 스티브의 집에 들렀어. 그녀는 스티브가 하인과 놀아났다는 소문을 믿지 않았어. 하지만 누구 아이냐고 캐묻진 않았지. 스티브가 입을 다문다는 건 아버지가 예사 사람은 아니라는 소리니까.

약 일년 후 스티브가 아이를 낳자 토니는 처음에 계획했던 것과는 다르게 욕심이 나기 시작했어. 천출도 승은을 입으면 신분 상승을 하는데, 하물며 황제의 아이를 낳은 스티브를 죄인의 이름으로 초라한 곳에 가둬두려니 기분이 여간 상하는 게 아니지. 거기다 궁에서 몰래 스티브를 만날 때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았어.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스티브를 만나러 나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거든. 토니는 몇 년 간이나 해왔던 숨바꼭질 놀이에 슬슬 염증을 느끼고 있었어. 내가 언제까지 숨어 다녀야 하지?


처음에 스티브를 폐위 시킨다는 계획은 피터와의 연을 어떻게든 끊어버리고 자신만의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욕심 때문이었고 결과도 토니의 뜻대로 됐지.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게 한도 끝도 없는 거잖아. 토니는 황후가 안된다면 첩실로라도 만들어 스티브를 궁으로 데려오고 싶었어. 하지만 궁으로 다시 데려오겠다고 하면 귀족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테고 본인도 궁에 돌아오는 건 원치 않을 테고 말이야. 토니는 갈수록 복합적인 마음에 초조해졌어. 하 어쩐다… 그냥 확 저질러 버려?




“궁이 그립지 않아?”


스티브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다 말고 토니를 빤히 봤어. 토니는 열심히 젖을 빠는 아이의 토실토실한 볼을 간지럽혔지.


“전 이미 궁을 떠난 죄인인데 미련 같은 게 있을리가요.”

“그럼 피터는?”


피터의 언급에 스티브의 낯빛이 어두워졌어.


“어떻게 지내는지 안 궁금해? 아마 피터도 널 보면 무~지 반가워 할텐데.”


토니는 시치미를 떼고 거짓말했어. 그런 일(토니가 벌여놓은)을 겪었으니 스티브가 반가운 손님은 아닐 거야. 토니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어. 아야. 아이가 유두를 깨물자 스티브가 고개를 숙이느라 마침 웃는 모습을 보진 못했지. “깨물면 안돼.” 스티브는 유두를 계속 오물거리는 아이를 조용히 타일렀어. 역시 피터만으론 약한가. 토니는 지나가는 투로 슬쩍 가족 얘기를 흘렸어.


“오랜만에 너의 가족을 만나보는 것도 좋지 않겠어? 부모님을 못본지는 얼마나 됐지?”


부모 얘기가 나오자 스티브의 어깨가 축 처졌어. 토니의 생각 대로였지. “역시 아직은 좀 보기 그런가?” 토니는 고개가 점점 스티브의 가슴께로 가까워지는 걸 자제할 수 없었어. 스티브는 말을 고르느라 계속 고민하는 모습이었어. 그리고 한참만에 나온 스티브의 대답은 NO였어.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한번 생각해봐.” 토니는 일단 한발 물러나는 듯 보였어. 하지만 그의 얼굴은 가슴께에서 떨어질 줄 몰랐어. 


“근데 스티브… 나 한입만 먹으면 안돼?”


모유를 맛보겠다는 의지는 절대 물릴 기세가 없어 보였지. 스티브의 임신 기간, 그리고 아이를 낳고도 한동안의 몸조리로 토니는 스티브에게 손도 못 대고 있었어. 끽해야 일주일엔 겨우 한번 거처를 찾는 토니는 스티브의 체취조차 맡아본지도 오래됐단 말이야. 제 아이를 안고 젖을 물리는 모습은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워 죽겠는데 가슴 성애자인 토니에게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는 건 참을 수 없는 곤욕이었어. 젖내가 풀풀 나는 오메가 향은 토니를 자극했지. 스티브가 얼굴을 붉히며 안된다고 했지만 토니의 손이 슬금슬금 가슴으로 파고들었어.


“그럼 입으로 살짝 빨기만 하면 안될까?”


스티브가 귓불을 붉히며 아이를 한쪽에 내려놓고 옷을 여몄어. 밖에 있는 시종들의 귀를 의식해서이지.


“아직 시종들이 밖에 있습니다.”

“네 밑에서 몇 년을 있었는데 저들도 눈치가 있다면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지 않겠어?”


토니는 스티브의 윗옷을 다시 풀어헤치고 가슴을 지분거리다 유두를 살짝 핥았어. 스티브의 몸이 흠칫 거렸어. 아이가 하도 깨물어 가슴이 많이 예민한 상태였지. 토니는 부드럽게 유두를 살살 빨았어. 투명한 액으로 번들거리는 토니의 입술이 춥 하고 떨어지자 스티브는 온몸이 저릿해지는 기분이었어. 토니가 알파 향을 스멀스멀 풀자 스티브의 아래가 젖었어. 오랜만의 잠자리로 달아오른 건 둘 다 마찬가지였어. 토니는 이제 젖.먹이처럼 입안 가득 가슴을 빨아들였지. 아… 스티브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오자 토니의 눈이 흥분감으로 고조되었어. 토니는 재빠르게 스티브를 자리에 눕히고 옷을 마저 벗기려 했어.


“마마, 큰아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어. 스티브의 누이가 온거야. 그녀는 스티브의 몸보신을 위한 약재를 전해주기 위해 이곳을 자주 찾고 있었지. 토니는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셨어.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허탈한 건 스티브도 마찬가지였어. “잠깐만 기다리라 해라.” 스티브가 일어나 빠르게 옷을 추스르자 토니는 스티브의 뺨에 입을 맞추고 아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어. 토니는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어. 혹시라도 스티브의 누이가 얼굴을 알아보면 안 되었으니까. 어차피 해가 저물어 얼굴을 식별하기 쉽진 않았지만 토니는 최대한 얼굴을 가리고 후다닥 지나갔어. 그녀는 토니의 범상치 않아 보이는 옷차림을 보고 아이의 아버지란 것만 지레짐작할 뿐이었지.


토니는 터덜터덜 궁으로 돌아오면서, 어떻게 하면 스티브를 다시 데리고 올 수 있을지에 대한 모색으로 머리를 굴리느라 여념이 없었어. 토니가 가족 얘기를 꺼낸 건 허투루 한 말이 아니었어. 아이를 낳은 소식을 들은 그의 부모가 스티브를 보고 싶어 한다는 건 연락망으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거든. 어느 정도 밑밥 깔기 용이랄까. 가족 얘기를 꺼내자 스티브의 마음도 흔들리는 걸 보면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았어. 대신들을 한자리에 다 모이게 한 뒤 가족 핑계로 스티브를 부르면 되려나. 물론, 속은 걸 알면 스티브가 화를 내긴 하겠지만 궁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토니는 일단 저지르고 보기로 했지.





토니가 스티브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로 한 날, 피터는 궁 밖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어. 공중에 날아가는 새를 쏴 맞히자 뒤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어. 피터는 스티브가 궁 밖으로 쫓겨나자 모든 걸 잊기 위해 다른 일에 전념하고 있었어. 피터는 스티브와 자주 하던 검술은 그만두고 직접 밖으로 나가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사냥을 다니기 시작했어. 뭐든지 금방 배우는 피터는 금세 빼어난 활 솜씨를 자랑했지. 피터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화살을 끼워 넣고 있는데 내관이 저 멀리서 뛰어왔어. “저하!”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내관이 숨을 헐떡 거리고 있었어. 왠지 ‘그날’처럼 다급한 얼굴로 말이지.


“저하! 급히 궁으로 들어오시라는 폐하의 전갈이옵니다.”

“무슨 일이라고는 말씀 안하시더냐?”

“예, 모두 저하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냥 하던걸 멈추고 빨리 입궁하라고만 하십니다.”


날 기다려? 피터는 토니가 무슨 일을 꾸미는 건 아닐까 불안했지. 그 시커먼 속내를 알 수가 있어야지. 토니는 스티브가 폐위된 후로도 피터의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어. 무슨 꿍꿍이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어. 피터는 토니가 스티브의 거처를 드나든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둘이 따로 살림을 차렸다고 억울해하거나 눈물을 짜고 싶은 건 아니었어. 차라리 눈앞에서 사라지니 속이 시원한게 솔직한 심정이랄까.


피터는 20세가 되면서 몰라볼 정도로 장성하고 있었어. 피터는 샬롯 오라비의 무리들과 곧잘 어울렸는데 그들은 책만 읽던 피터와는 질이 다른 부류였어. 피터는 그들과 어울리며 여자와 술에 쉽게 빠져들었어. 어릴 때와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오메가들과 놀아나기 시작한 거지. 샬롯은 세자빈이긴 했지만 일단 베타였기 때문에 피터의 관심에서 배제되었어. 그리고 스티브의 자리를 대신한 그녀는 애초에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어. 세자빈이라는 호칭은 저절로 스티브를 상기시켰거든.


사람들은 피터가 커갈수록 바람둥이인 토니를 닮아간다며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들 했어. 피터는 점점 남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적개심을 토니에게 드러냈고 부자의 갈등은 점점 골이 깊어가고 있었지. 




“이쪽입니다.”


낯익은 토니의 내인이 스티브의 길을 안내했어. 스티브는 지금 궁에 와 있었지. 폐위로 쫓겨난 지 약 2년 만의 일이었어. 하… 내가 뭘 하는 거지. 스티브는 다신 궁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연을 끊듯이 살던 그의 부모까지 시간을 내어 궁에 한번 들른다는데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는 거지. 왜 하필 궁에서 만나자는 건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출궁한 후 제대로 본가와 연락도 못하고 지낸 스티브였어. 그리고 피터의 근황이 궁금하기도 했어. 마지막으로 본 게 피터가 창부와 하룻밤을 보내고 사과하러 왔을 때였거든. 스티브는 피터를 매정하게 돌려보냈던 것이 계속 후회됐어.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냥 안부나 가볍게 물으러 가는 거니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는 않을 것 같았어. 이곳도 참 오랜만이구나. 익숙한 곳을 거닐으며 스티브는 궁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렸지. 토니랑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 곳도 피터와 수련을 하던 곳도. 짧지만 모두 다 추억이 서려있는 곳들이었어.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만 알았던 사람들을 궁에서 만나려니 긴장도 되고 가슴이 벅차올랐어. 피터는 어떻게 변했을까, 스티브는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가끔 피터 얼굴을 보며 안부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어느새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어.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내인이 옆으로 비켜 서자 시종들이 문을 열었어. 하지만 문이 열리자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운 이들이 아니었어. 스티브는 발을 들이고는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걸 느꼈지. 우두커니 굳어있는 스티브에게로 일제히 시선이 쏠렸어.


“스티브, 이리와.”


양쪽으로 수많은 귀족들이 일렬로 자리해 있었어. 토니가 상석에 앉아 제 쪽으로 오라며 손짓했어. 가족과 피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 이게 무슨… 예기치 않은 불청객의 등장에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귓속말로 속닥거렸어.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어. 간신히 토니 앞으로 가자 토니가 옆에 있는 빈 좌석을 가리키며 앉으라 했어. 스티브는 거의 패닉 상태였어. 사람들이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어. 스티브가 굳어있자 토니가 내려와 직접 제 옆자리에 앉혔어. 갑자기 나타난 스티브가 상석에 앉자 다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장내가 소란스러워졌어.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달라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어.


“자, 자 조용들 하시오. 아직 중대 발표를 하기 전에 도착해야 할 사람이 남았으니.”


토니가 모두를 좌중 시키자,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피터가 들어왔어. 피터는 사냥을 하다 말고 불려온 차림이었어. 갑자기 불려들어온 피터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 하지만 토니 옆에 앉아 있는 스티브를 보고는 차갑게 가라앉았어. 스티브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변함없이 아름다웠어. 자신을 기만했던 사람이라고 보기엔 놀라울 정도로 순수해 보였지. 스티브는 제법 성인 티를 내고 있는 피터를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어. 토니가 눈빛을 교환하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피터를 향해 입을 열었어.


“인사해라, 피터. 이제부터 네 어머니가 될 분이시다.”


찬물을 끼얹은 듯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어. 스티브도, 좌중에 있던 모두도, 다 놀라 얼어붙었어. 토니만 눈을 가늘게 뜬 채 피터의 반응을 궁금해했어. 모두가 다 숨을 죽였고 스티브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던 피터는 고개를 들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어. 피터는 더 이상 토니 앞에서 스티브를 구해달라고 울던 어린애가 아니었어. 토니가 눈살을 찌푸렸어.


“세자는 왜 웃기만 하고 말이 없지?”

“……”

“이 애비의 말이 이제 말 같지도 않다는 거냐?”

“왕실의 법도가 지엄하거늘, 폐서인을 제가 어찌 지어미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이 되면 그때 어머니라 불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소자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피터가 등을 휙 돌리고 나가자 토니가 몸을 들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혀를 찼어.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생각보다 피터는 더 노련해진 것 같았지. 스티브는 자기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소맷단을 구겼어. 제게 쓴웃음을 날리는 피터의 눈빛에서 냉기를 느꼈지. 깜짝 놀란 사람들만큼이나 스티브의 충격도 컸어. 온몸의 핏기가 순식간에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어. 피터가 나가자 스티브는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어. “스티브, 잠깐.” 토니가 떠들썩한 좌중을 뒤로하고 급히 스티브를 따라 나갔어. “기다려봐. 잠깐만.” 하지만 토니도 찔리기는 하는지 스티브를 멈춰 세우진 못했어. 스티브가 계속 거리를 유지하며 졸졸 따라오는 토니를 돌아본 건 내전을 나와 절반쯤을 가로질렀을 때였어.


“…대체 왜 거짓말 하셨습니까.”

“가족 핑계로 널 부른 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고 정말 미안한데 말이야.”

“정녕 제게 미안하긴 하신 겁니까?”

“스티브, 진정하고 제발 내 말 좀…”

“왜 자꾸 독단으로 일을 처리하시는 겁니까?”


스티브는 정말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지. 앞뒤 안재고 그가 일을 벌이면 이해하고 받아줘야 하는 건 언제나 스티브의 몫이었으니까.


“알면 네가 승낙했을 것 같아?”

“…지금 그걸 말이라 하십니까?”


스티브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차가웠어. 토니는 큰일 났다 생각했지. 어떻게든 화를 가라앉혀야 했어.


“스티브, 아이 생각을 해봐. 우리 공주님도 계속 그곳에 둘 순 없잖아. 황손을 언제까지 폐서인의 자식으로 둘 생각인건데?”

“폐서인의 자식으로 만든 사람이 누군지는 본인이 더 잘 아실텐데요.”


스티브는 토니를 원망했지만 눈매는 아까보다 한층 수그러져 있었어. 토니는 스티브의 가장 약한 부분이 아이란 걸 알고 있었어. “너도 우리 아이를 평생 저런 곳에 두고 싶은 건 아니잖아, 그치?” 토니가 다가와 어깨를 다독였어.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에요. 폐빈이 황후라니 가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당장에 널 황후 자리에 앉히겠다는 소리가 아냐. 그런 얼굴 하지 마, 제발. 폐위될 때부터 이미 다 각오한 일이었잖아.”

“귀족들이 허수아비가 아닌 이상 이 일은 절대 납득 못할 겁니다. 그리고 저하도…”

“다 필요없다고 해. 이 토니 스타크가 널 평생 저런 허름한 곳에 가둬 둘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니까.”


스티브는 너무 힘들었어. 바깥에 있는 동안 좀 평온하다 싶었는데,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파문을 일으키니 사람들이 또 얼마나 뒤에서 씹어댈까 두려웠어. 그리고 피터에게 알려진 건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지. 그동안 토니와 놀아난 걸 다 알게 될 것이 두려웠어. 마지막까지 자길 믿어준 피터와 이런 식의 재회는 결코 아니었어. 새로운 세자빈과 혼약도 했으니 스티브는 그저 피터가 잘 되길 바랄 뿐이었어. 하지만 피터가 전말을 다 알고 있는 이상 그와 잘 지내보려는 건 스티브의 과욕일 뿐이었지. “내 침소로 가자.” 애초에 세자빈도 뭣도 아닌 스티브에게 선택권이란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어. 사실 토니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스티브가 의지할 사람이라곤 토니밖에 없었으니까. 토니가 울상이 된 스티브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이끌었어. 스티브는 토니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어. 아무도 이 둘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놀라서 저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뜰 뿐이었지.




스티브가 궁으로 돌아와 토니와 공식적인(?) 첫날밤을 보내고 있을 무렵 피터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어. 또다시 그 끔찍했던 별궁에서의 두 사람의 밀회를 꿈속에서 목격하고 있었지. 피터는 스티브의 아래에 고개를 처박은 토니를 멍하니 보고 있었어. 잠시 후 토니가 고개를 서서히 들었어. 하지만 이번엔 그때와는 다르게 그의 눈길이 똑바로 피터를 향했어. 토니가 피터를 바라보고 있자 스티브도 따라서 피터를 바라봤지. 두 쌍의 눈동자가 피터를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얽매었어. 도망 가려 했지만 발이 얼어붙은 것 마냥 움직이지 않았어.


헉! 꿈에서 깨어난 피터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어. 더 이상 꾸지 않던 악몽을 스티브가 오자마자 다시 꾸게 된거지. 피터는 이제 겨우 잊을만하니 다시 돌아와 자신을 아프게 하는 스티브가 미워 견딜 수가 없었어. 아내였던 사람이 이제는 어머니라니. 촌극도 이런 촌극은 없었어. 피터는 또다시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돼버린 것만 같아 화가 났지. 분명히 자길 향해 비웃던 토니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어. 대체 뭐가 문제야. 왜 자꾸 날 가만히 두려 하지 않는 건데? 피터는 아무리 가라앉히려 해도 주체하는 화를 다스릴 수 없었지.









으윽..제목에 피터스팁을 넣어야할거 같아서 넣긴 넣었는데 피터스팁은 전혀 아닌거 같습니다..?

내용은 점점 막장으로 달려가는데...아니 원래 처음부터 막장이었잖아=_=

사실 제 머릿속에선 전편에서 다 끝난건데 계속 쓰려니까 내용이 영...제 망상은 거기서 거기라니까요;

재미없는거 계속 보시는 분들도 지겹겠다…언넝 끝낼게요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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