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는 n년차 무명 배우였음. 세바스찬이랑 같이 동거하는 사이였고. 크리스는 언제 뜰지 모르는 날만 기약하며 알바까지 겸임하면서 어렵게 생활하는 배우였어. 세바스찬에게도 민폐인 것 같아서 배우생활 그만둘까 생각해 보는데 그때마다 옆에서 세바스찬이 격려해주었음. 그래서 크리스는 열심히 해봐야겠다 긍정적으로 생각했지. 열심히 오디션이란 오디션은 다 보고 다니는데 맨날 미끄러지기 일쑤였음. 그날도 어떤 새로운 영화 오디션이 있었어. 크리스는 단역이라도 됐으면 하는 심정으로 오디션 장을 찾았지. 심사위원들 앞에서 대본을 읽는데 그날따라 크리스를 보는 표정들이 완전 맘에 쏙 들었다는 눈치인거야. 그 자리에서 크리스를 주연으로 쓰고 싶다고 다들 만장일치로 결정했어.


크리스는 난생 처음 주연이라니까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갔어. 세바스찬한테 전화하니까 자기 일처럼 기뻐해줬지. 집에 오자마자 세바스찬이 축하파티를 열었어. 샴페인 잔 부딪히면서 세바스찬이 이제부터 시작이야. 다 잘 될꺼야 라면서 진심으로 축하해줬지. 크리스는 태어나서 이렇게 행복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며칠 후 크리스는 영화 촬영을 하러 몇달간 집을 떠나게 됐어. 세바스찬이랑 작별 인사를 나누고 스탭들을 만나러 갔어. 그곳에서 몇시간 동안 차를 타고 촬영장소로 이동했지. 창밖으로 캄캄한 풍경을 보며 크리스는 장시간 이동이라 차안에서 계속 졸았어. 완전 한밤중이 되어 촬영장소에 도착했어. 일행은 어떤 별장 같은 곳에 투숙했어. 크리스는 별장에서 집사의 안내로 자기 방으로 갔지. 짐을 풀고 그날은 너무 늦은 시각이라 잠에 곯아 떨어졌어.


다음 날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됐어. 촬영이 시작되기 전 크리스는 주연 역(스티브)에 맞는 분장을 했어. 브루넷은 금발로 염색하고 약간은 고전적으로 보이는 가르마를 타 넘긴 머리를 했어. 크리스가 2층에서 분장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어. 거실에 있던 스탭들이 계단에 서있는 크리스를 보고 모두 놀라움에 입을 벌렸어. 걔 중 한명이 감탄사를 뱉었어.


- Perfect...


대본을 받고 카메라 촬영에 들어갔음. 크리스는 외운대로 상대방과의 연기에 몰입했어.


- 스티브, 그때 상황을 말해 볼래요?

- 남자가 제 목을 졸랐어요... 순간 전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어요.

- 그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나올 수 있었던 거죠?

- 살인자는 제가 숨을 쉬지 않자 죽은줄로 착각한거 같아요. 그땐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절 구덩이에 버려두고 가길래 정신없이 뛰쳐나왔고...긴장이 풀리자 탈진해 쓰러졌어요. 그리고 눈을 뜨자 불빛이...

- 미스터 로저스? 괜찮아요?

- ...아뇨...너무, 너무 끔찍한 경험이었어요...그 남자 눈빛은...


크리스는 말끝을 흐리며 흐느끼면서 몸을 움츠렸어. 컷! 이 외쳐지고 장면은 끝이 났지. 다들 완벽했다면서 칭찬했어. 크리스는 뿌듯했어.




그리고 그날 밤 어떤 남자에게로 영상이 전송됐어. 동시에 영상을 받은 남자의 폰이 울렸지. 전화를 받은 남자가 화면에 떠있는 영상 파일을 보며 이게 뭐지? 라고 하자 상대방이 보면 알꺼라면서 웃었어. 남자가 영상을 재생시키니 스티브 로저스로 분한 크리스의 모습이 나왔어. 


[남자가 제 목을 졸랐어요... 순간 전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어요.]


화면에는 금발의 남자가 두려움에 떨며 흐느끼는 장면이 나왔음. 완벽히 스티브 로저스의 모습이었어.


[살인자는 제가 숨을 쉬지 않자 죽은줄로 착각한거 같아요. 그땐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절 구덩이에 버려두고 가길래 정신없이 뛰쳐나왔고...]


남자가 그 모습을 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어. 그러다 잠시 후 차분한 표정으로 가라앉았지. 남자가 말이 없자 전화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낮게 웃었어.


[놀랐나? 스티브는 아직 멀쩡히 살아있다.]

- 내가 분명히 죽였어. 게임은 내가 이긴걸로 끝났다고.

[아니. 네 눈앞에 버젓이 스티브 로저스가 살아있잖나.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애송이. 우리가 그렇게 호락호락 할것 같았나?]


남자가 장갑 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다시 크리스의 영상을 돌려봤지.


-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못 믿겠는데. 내가 그를 죽인 증거로 넷째 손가락을 잘랐으니까.

[오호... 설마 스티브가 가짜일까봐? 너 답지 않게 동요하는 모양이야.]

- 웃기는군.

[이번엔 네가 실수했어. 게임을 다시 시작하자고, 톰 히들스턴]


전화 속의 남자가 음산하게 킬킬거리다 통화가 끊어졌어.




그 촬영이 있은 후 더이상 영화 촬영에 진전이 없었음. 크리스는 세바스찬이 걱정됐어. 폰은 별장에 도착한 날 압수당하듯이 뺏겨 세바스찬에게 연락 한번 못해봤거든. 집사에게 폰을 달라고 하자 전화가 터지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면서 안돌려 주는거야. 크리스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걸 느꼈어. 크리스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거실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지. 그런데 수신음이 전혀 안들리는거야. 전화선은 끊어져 있었음. 크리스는 다음 날 새벽, 몰래 별장을 빠져나왔어. 눈이 펑펑 와서 허벅지까지 쌓여있었어. 크리스는 눈을 헤치며 무작정 걸었어. 그러다 운좋게 공중전화 박스를 발견했어. 신이시여. 크리스는 신을 외치며 전화박스로 들어갔지. 전화를 걸자 세바스찬이 받았어. 크리스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안도감에 울먹거렸어.


- 셉? 셉? 나야, 크리스

[크리스? 연락도 없이 어떻게 된거야! 목소리는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셉...여기 뭔가 이상해. 연락도 못하게 하고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이 사람들 나한테 뭔가 숨기는게 영화 촬영하러 온게 아닌거 같아. 아무래도 나 곤경에 빠진거 같아. 이제 어떡하지?

[경찰에 연락할게. 혹시 위치 알 수 있겠어?]


크리스는 깜깜한 밤중에 이동했기 때문에 길을 자세히 식별할 수 없었어. 이제와 생각해보니 일부러 밤에 이동했던거야. 크리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분히 생각해내려 노력했어.


- 이동하던 중 댄버 st. 사거리에 큰 주유소를 지나쳤던거 같아. 거기서 동쪽 방향으로 계속 이동했어.


세바스찬이 최대한 찾아보겠다고 하고 동전이 다 떨어져 통화는 끊어졌어. 크리스는 전화박스에서 나와 눈길을 헤치며 걸었어. 발이 푹푹 눈속으로 꺼졌어. 크리스는 어떻게서든 별장에서 벗어나고 싶었어. 끝도 안보이는 새하얀 눈길이 펼쳐져 있었어. 발자국을 새기며 무작정 걷고있자 멀리서 미스터 에반스!!! 하는 목소리가 들렸어. 집사가 자기를 쫓아오고 있는거야. 크리스는 계속 눈을 헤치며 도망가려 했지만 허벅지까지 쌓인 눈 때문에 걷는덴 한계가 있었지. 눈으로 엎어져 버둥대고 있자 어느새 쫓아온 집사가 크리스의 팔을 잡고 일으켰어.


- 왜 여기 계신거에요? 같이 별장으로 돌아가요.


크리스는 얌전히 별장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어. 울고싶은 표정으로 거실에 앉아있자 집사가 크리스에게 안정을 취하라며 뜨거운 차를 건냈어. 크리스는 차를 마시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어. 혹시 몰라 문도 잠궜어. 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는데 순식간에 잠이 쏟아지는거야. 크리스는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어. 그리고 몇시간 후 방안엔 크리스의 숨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고 있었고. 갑자기 한쪽 벽에 있던 책장이 꿈틀 움직였어. 그리고 움직이던 책장이 옆으로 밀리더니 벽이 돌아갔어. 비밀 통로가 있었던거야. 벽이 열리더니 방안으로 몰래 집사가 들어왔어. 집사가 침대에 곤히 자고 있는 크리스를 내려다봤어.


다음 날 아침 크리스의 눈이 번쩍 떠졌어. 왠지 정신없이 잠에 취해있었던거 같았어. 눈을 비비는데 이상한게 느껴져 자기 손을 내려봤는데 왼손에 붕대가 감겨있었어. 크리스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붕대를 풀었지. 그리고 붕대가 다 풀리자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어. 네번째 손가락 끝마디가 잘려있었어. 별장에 크리스의 찢어지는 비명이 울렸어. 이제 크리스는 빼도박도 못하게 스티브 로저스였어.



아무튼 이 뒤로 내용이 기억 안나서 zip zip 하고

크리스가 모든 일을 다 알아버려서였나 집사가 크리스 죽이려고 함. 크리스는 옷장에 숨어있는데 집사가 전기톱 들고 휘두르며 방안에 물건 자르고 크리스도 죽을뻔 했다가 어떻게 집사 죽이고 밖으로 탈출했는데 경찰차 여러대가 별장을 둘러싸고 있었어.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으니까 경찰차에서 세바스찬이 뛰어내렸어. 세바스찬이 어떻게 크리스가 말한 주유소 있던 사거리를 추적해 외딴 곳에 있는 별장을 찾아낸거였지. 크리스가 울면서 세바스찬한테 안겼어. 경찰차에 타고 돌아가는 내내 안겨 계속 감정에 복받쳐 울었어. 세바스찬이 다 끝났다며 다독여주었어.


이렇게 영화는 끝이 나는데 더 끄적여보고 싶다.


크리스는 짤린 손가락 찾아서 봉합수술을 하고 계속 병원에 입원해있었어. 신체적으로 이상은 없었지만 문제는 정신적인 것이었거든. 영화 찍으러 갔다가 미치광이들한테 죽을 봉변 다 당했는데 정신적 데미지가 장난아닐테니까. 세바스찬이 옆에서 간호해주고 덕분에 상태도 점점 호전돼가고 있었지. 그러다가 세바스찬이 없을때 낯선 남자가 크리스를 찾아오는데 그 남자가 톰이었으면 좋겠다.


크리스는 톰을 모르지만 톰은 스티브를 죽인적이 있기 때문에 얼굴은 앎. 실제로 보니까 자기가 죽인 스티브랑 너무 닮아서 신기한거야. 톰이 상냥한 얼굴로 인사하면서 말을 건네고 대화하다가 크리스 손목을 쓸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손가락에 입맞춤 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거지.


- 스티브의 아름다운 손가락처럼 당신 것도 맘에 드는군요. 잘라서 갖고싶을 정도로...


톰이 크리스의 봉합한 부분을 엄지로 쓸었어. 크리스의 눈이 충격에 휩싸여서 아무 말도 못하는데 부드럽게 목덜미를 쓰다듬는거야.


- 흥미롭네요. 스티브도 목 졸리면서 당신과 똑같은 눈빛으로 날 바라봤었는데.


목을 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자 크리스가 소리지르면서 저항했어. 톰은 이 자리에서 딱히 크리스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있던건 아니었어. 크리스가 경련하자 손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어. 방을 나가는 톰의 눈은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눈빛이었지. 톰이 방을 막 나가고 세바스찬이 들어오다가 경련하듯 발작하는 크리스를 보고 놀라 뛰쳐들어왔어. 크리스? 왜 그래! 세바스찬이 놀란 크리스 안고 등을 다독여주겠지. 뭐 이렇게 톰이 주변을 맴돌며 계속 크리스 노리는거 보고싶다. 세바스찬 없을때 몰래 집 숨어들어가서 크리스랑 잣죽 먹으며 죽지 않을 정도로 목 조르는것도 보고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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