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상해에 왕맹이란 이름을 가진 남자는, ‘동방의 파리’ 라고도 불리는 세계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는 이 국제도시에서 큰돈을 벌어들인 무역 상인이었다. 그는 주로 중계 무역으로 돈을 벌어들였으며, 부수입으로 돈 많은 여행객에게 집을 제공하고 물건을 팔아 짭짤한 이득을 남기곤 했다. 그가 파는 물건이란 것들은 중국의 골동품이나 값나가는 희귀품들이었다. 어느 날 루마니아에서 온 세바스찬이라는 남자가 그의 레이더망에 걸렸다. 많은 하인을 대동한 이 서방인은 한눈에 봐도 돈 많은 호구 정도로 보였던 것이다. 왕맹은 이 남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온갖 공을 들였고 중국을 여행하며 묵을 집이 필요했던 세바스찬은 왕맹의 집에 머무르기로 했다. 그날 서방인을 환대하기 위한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끝없이 나오는 음식들과 화려한 곡을 연주하는 기악단, 아름다운 무용을 선보이는 미녀들까지 등장해 분위기를 달궜다. 술잔을 나누며 분위기가 무르익자 왕맹이 말했다.


“멀리서 이곳까지 온 손님을 그대로 돌려보낼 순 없지요.”

“아직도 보여주실 게 더 있다는 겁니까? 지금까지 대접해 주신 것만으로도 혼이 다 빠졌는데요.”


세바스찬이 유창한 중국어로 대답했다. 하지만 왕맹이 보기에 그의 대답은 집 주인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것일 뿐, 세바스찬은 보통의 남자들과 달리 성대한 음식에도, 음악에도 심지어 미녀들에게 조차 관심을 두는 것 같지 않았다. 왕맹이 하인들에게 눈짓하니 곧 천으로 가려진 작은 물건이 들려져 왔다. 세바스찬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물건에 호기심을 보였다. 천을 걷자 작은 쟁반 위에 진홍 색의 둥그런 과일이 올려져 있었다. 복숭아? 세바스찬이 의아함에 묻자 왕맹이 입을 열었다.


“이건 보통 복숭아가 아닙니다. 아주 신비로운 전설이 있는 진귀한 천도복숭아지요.”

“무슨 전설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무도 본 사람은 없지만 인간으로 변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흥미롭군요.”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인 세바스찬이 다시 복숭아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봤다.


“워낙 희귀해 온 세계를 뒤져 어렵게 구한지라 부르는 게 값인 과일입죠.”

“이렇게 귀한 복숭아를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있다는 겁니까?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는군요.”

“가격이 부담스러우시면 저희 집에서 묵으며 천천히 결정하셔도 됩니다.”


왕맹이 술병을 들어 보이자 세바스찬이 화답하며 잔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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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나하게 취한 세바스찬은 왕맹이 내 준 방으로 안내되었다. 오랜만에 마신 술이 머리를 빙빙 돌게 했다. 푹신한 침대에 누운 채 하인들이 가져다 놓은 복숭아를 바라봤다. 인간으로 변하는 과일이라니… 이때껏 세계를 유람하며 들어본 얘기 중 가장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이것은 순진한 방문객을 한탕 벗겨 먹으려는 장사꾼의 수작임에 틀림없었다. 세바스찬은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음흉한 왕맹의 얼굴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하지만 사람으로 변한다는 설정은 꽤 흥미로운 얘기임에는 틀림없었다. 세바스찬은 잠시 과일이 진짜 사람으로 변하면 어떤 타입이 좋을까를 생각했다. 그는 곧 복숭아를 손에 들고 흐뭇한 얼굴로 망상을 떠올렸다. 기왕 사람이 될 거면 빵빵한 글래머 타입이 좋겠군. 금발이면 더 좋고… 세바스찬은 눈을 감고 즐거운 상상을 하다 복숭아를 배에 그대로 올려둔 채 잠이 들었다.


한참 잠에 곯아떨어졌던 세바스찬은 어느 순간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곧 그는 배가 무겁다는 생각에 잠에서 깨어났다가 눈앞에 벌어진 기이한 상황에 한동안 멍하게 앉아있었다. 복숭아는 사라지고 자신의 배에 웬 벌거벗은 남자가 엎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남자는 금발에 여자만 한 굴곡을 자랑하는 가슴을 달고 있었다. 자신이 상상하던 그대로의 모습이라 세바스찬은 제 볼을 꼬집어봤다. 그는 술에 취해 헛것이 보이는 게 아니면 아직도 꿈을 꾸는 것일 거라고 중얼거렸다. ‘이건 꿈이야 꿈’ 세바스찬이 황망함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벌거벗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기이한 남자는 잠이 덜 깬 흐리멍덩한 얼굴로 세바스찬을 응시하더니 얼굴을 바짝 갖다 댔다.


“안녕하세요, 새로운 주인님.”


쪽- 하고 빨간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세바스찬은 너무나 생생한 감촉에 자신의 입술을 더듬었다. WHAT THE HELL… 꿈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입이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는데 금발 남자가 새파란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이불을 제치고 세바스찬의 배 위에 앉았다.


“지금 뭐, 뭐하는…”

“주인님은 이런 거 싫어하세요? 예전 주인님은 좋아하셨는데.”


남자가 정확히 세바스찬의 아랫도리 위에 앉아 엉덩이를 비볐다. 오 마이 갓뜨…! 남자는 샐쭉거리며 배 위에 손을 얹고는 열심히 엉덩이를 움직였고 눈치 없는 주니어가 기립하기 시작했다. 세바스찬은 어쩔 줄 몰라 벌건 얼굴로 코에서 거친 숨만 뿜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눈앞에서 빵빵한 가슴이 움직이니 참을 수 없었던 세바스찬은 본능적으로 가슴을 쥐었다. 양손을 둔덕 위에 턱하고 올리니 복숭아처럼 탄력 있는 것이 손에 알맞게 잡혔다. 살살 주무르니 남자가 콧소리를 내며 야릇한 표정을 짓는다. 에라 모르겠다. 창부라고 생각하지 뭐. 세바스찬은 빠르게 타협을 마치고는 남자의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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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보여주신 복숭아 말인데요.”


다음 날 아침 세바스찬이 왕맹을 보자마자 꺼낸 말이었다. 세바스찬의 얼굴은 다크서클이 눈 밑까지 내려와 하룻밤 사이 꽤나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벌써 마음을 결정했다는 사실에 되려 왕맹이 초조해졌다. 며칠 정도 살살 구슬려 복숭아를 팔아먹으려는 목적이었지만, 하루 만에 먼저 얘기를 꺼내니 거래 실패일 확률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부담스러우신 건가요? 그렇다면 저희가 다른 걸 보여드리…”

“아뇨, 사겠습니다.”


세바스찬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노련한 장사꾼은 돈 많은 호구를 더 부추길 필요가 있단 생각에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복숭아를 보고 싶다는 다른 여행객이 계셔서…”

“돈은 부르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 이 복숭아는 제껍니다.”


부르는 대로 쥐워준다니 더 이상 사양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왕맹은 시장에서 파는 흔한 복숭아를 구해다 인간으로 변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갖다 붙였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가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고 엄청난 돈을 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보기보다 어리석은 사람이구나. 왕맹은 예상치 못한 대어를 낚았다는 생각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편하신 대로. 세바스찬은 보드라운 실크 이불에 누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정체 모를 글래머’를 떠올렸다. 생각은 다르지만 거래를 성립한 두 남자가 얼굴을 마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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